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코티지 가든 에디션)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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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누워만 있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내려놓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들과 해야 하는 것들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는 걸 경험하면서 어떻게 살아도 살아는 지는구나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더욱 움켜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내 힘으로 어느 정도 앉아서 생활할 수 있을 때에는 우습게도 책이 잘 읽히지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어떤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퍽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한 해의 끝, 연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들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좀 더 가벼운 책을 읽어도 괜찮지 하며 타샤 튜더의 책을 골랐다.



나의 정원은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어디에 무얼 심을까, 여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궁리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또한 정원이나 식물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아직 잔뜩 있습니다. 한 가지 새로운 걸 배우면 더욱더 알고 싶어지지요.

나는 아흔 살이 넘은 지금도 장미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답니다. 전문가가 되고 싶다, 정말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꿈을 따르는 일이 즐겁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그 모든 것의 해답을 알 수는 없어요. 그러니 더 많이 알고 싶거나 더 연구하고 싶은 꿈에는 끝이 없는 거죠. 더 배우고 싶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즐거움은 누구든지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으뜸의 기쁨이랍니다.

-타샤 튜더



56세에 버몬트 주 산골에 30만 평의 땅을 샀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 땅을 모두 정원으로 가꾸었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매달 매 계절마다 새로운 꽃이 피고 과실이 열리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 정원을 일평생 가꾸었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타샤 튜더의 태도가 부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알아채고 더 좋아하고 더 배우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그러는 동안 타샤의 애정과 손길을 느낀 정원이 보상이라도 하듯 다채롭게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이 말이다.






모든 일에는 과정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과정이 좋았더라도 결과가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세상을 살면서 너무나도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타샤가 기대한 결과는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YES or NO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에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부지런한 타샤로부터 가꿔진 정원과 타샤, 함께 살고 있는 코기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걸 보면서 경외심이 일었다. 이게 되는구나. 고작 사십여 키로의 무게의 아흔 살에 가까운 여성에게서 이런 정원이 가꾸어질 수가 있구나. 이건 정원을 가꾼다는 것을 넘어 나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정원이 곧 타샤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내가 기르고 있는 (혹은 알아서 길러지고 있는) 식물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 j가 열심히 물을 주었지만 내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혹은 관심을 덜 받아서 그런 건지 주눅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잎을 조금씩 만져주고 영양제를 주고 물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보다 싱싱해보이는 건 단지 기분탓일까? 그래도 고마웠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봐주는 것 같아서.



타샤처럼 넓은 정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타샤처럼 부지런하지도, 끈기가 있지도 않고 매 순간마다 애정을 줄 자신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몇십 분의 일의 텃밭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앞서서 결국 황폐해지는 땅을 바라보게 될 확률이 더 크다는 것도. 집에는 나만의 텃밭이 있다. 그 작고 평평한 텃밭에는 상추를 심어두었고 오늘도 열심히 자라고 있다. 아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텃밭은 고작 이만큼의 작은 것이지만 점점 더 넓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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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섬세함 - 이석원 에세이
이석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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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려다가 간편하게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렸다. 조금 더 간편해지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처럼. 커피만 마실까 하다가 초콜릿도 내왔다. 조금 더 달콤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서. 오늘만큼은. 뜨거운 커피는 혀에 있던 초콜릿을 단박에 녹였다. 우리의 관계처럼.




자의로든 타의로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살면서 타인과 무수히 많은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나는,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구질구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러려고 퍽 노력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그것은 이전에 끊어진 관계에 대해 후회를 한 적이 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됐을 관계들이었다. 미성숙한 마음들이 모여 관계를 형성했던 그때의 나는 네가, 너는 내가 될 수 없었으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나의 입장에서 너를 향해 뾰족하게 내뱉었으니.




이미 지나가버린 관계들을 떠올리며 미성숙했던 우리들을 고스란히 넣어두고, 내 앞에 주어진 관계들을 가만가만 손으로 짚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관계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최선이 나에게 최선인지 그에게 최선인지는 모르고 방법은 더더욱 모르는 막연한 상태로.



최근에는 내가 한때 사랑했(겠)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한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제멋대로 흐르는 것을 고요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면서 이모를 떠올린다. 이모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런 걸 보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이해들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고 싶은 순간이 당연히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해명을 하거나 변명을 해왔지만 내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오해를 즐기는 삶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는 (몰염치하게도) 나에 대한 이해를 바라곤 한다.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물론 입안에 물고 내뱉지 않을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사설이 길었지만, 이석원은 그것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삶의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 우리는 단편적으로 바라보지만 이후에 입체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고로 세상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97. 남의 하소연을 함부로 징징댐으로 치부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 남들과 대화할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시선을 주는 것. 누군가 아파 쓰러지면 무작정 일으켜 세울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를 봐가면서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

다시 말해서 주인공은 도움을 주는 내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 상대라는 사실을 항시 잊지 않고, 따라서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로 하고 받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섬세함이라고나 할까.

출처 입력





그것을 아우르는 것을 이석원은 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타인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시선을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하게 하는 것.


그러면 나는 입원 당시 간호통합병동의 간호조무사들의 거침없던 손놀림은 업무가 많아서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못해서 그랬구나,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내릴 건데) 본인이 내리겠다고 나를 밀쳤던 것도 급한 일이 있었구나, 회사에서 신입이 A부터 Z까지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물리치료를 가야 해서 소독해주는 여사님께 연락해보니 바로 온다고 했는데도 늦는 것은 비가 와서 그랬구나, 그러고 집에 들어와서 난데없이 여기저기 문을 열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직 다른 집도 많이 남아있나보구나...(?) 해야 한다는 건데... 참 어려운 일이다.




많은 해를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크고 작은 소동들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 인생이었다.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의식적으로라도 편하게 힘을 뺀 채로 늘어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해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버리는 것.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그것은 (오늘 오후에) 미리 세운 2024년의 목표와도 닮아있다.



덧) 하지만,

1. 달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것에 대해 꼭 ‘죽어도 좋을 만큼의 쾌감이라고’ 표현해야했을까.

2. 빵 한 쪽과 단 음료수를 마시는 행위가 잘못은 아니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일생을 참회해야했던 이의 잘못도 없었다는 것은 어째서 잘못‘’라는 보조사가 붙었을까. 도대체 어떤 것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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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오페라 - 아름다운 사랑과 전율의 배신, 운명적 서사 25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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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처음 본 건 작년으로 <아이다>었다. 내가 근 5년간 살던 대구에서는 대구국제오페라 축제를 매년 해왔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으로만 미루고 있다가 겨우 <아이다> 하나만 보고 온 것이었는데 이곳에 이사를 오니 그때 기회가 좋았음을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늘 사람은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후회를 하지. <아이다>는 내용도 모른 채 보게 되었는데도 너무 좋았는데, 이후에 보는 오페라들은 내용을 알고 보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이제 와서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책 <방구석 오페라>를 읽어보기로 했다.


<방구석 오페라>에는 총 25편의 오페라를 실었는데, 오페라의 용어 해설부터 구성요소에 대해서도 수록되어 있기에 평소 오페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괜찮았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없잖아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좀 더 알고 싶은 오페라의 경우에는 유튜브나 검색을 통해 관련 지식을 추가로 더 쌓게 되었다.



오페라의 끝부분에는 대표곡을 들을 수 있게 QR코드가 마련되어 있어서 나의 경우에는 가장 뒷장을 먼저 펼쳐 QR코드를 찍은 뒤에 그 오페라의 기본 지식을 읽어나갔는데, 그러다보니 마음에 드는 오페라는 공연까지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해당 공연이 현재 있는지도 찾아보게 되었다. 특히나 <이도메네오> <피델리오> <살로메> <율리시스의 귀환> <파우스트>가 그랬다. 수록되어 있는 오페라 중에는 가끔 삼류영화 같은 구성도 있어서 오페라도 역시 다를 것 없구나 하며 웃기도 했는데 그래도 공연은 좀 다르겠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날도>를 읽을 때는 조수미 음성의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를 들었다. <리날도>는 헨델이 런던 무대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첫 번째 이탈리아어 오페라인데, 극 전체가 노래로 구성된 오페라는 익숙하지 않은 장르였기에 낯설다는 이유로 200년 동안 외면받다가 1970년을 시작으로 다시 공연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오페라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리날도>의 경우에는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명성을 얻으면서 역으로 오페라를 알렸다고 했다. <리날도>는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라는 줄거리로 아이들을 위한 오페라이기도 하고, 오페라 입문을 위한 작품으로도 손꼽힌다고 한다. 나는 오페라의 줄거리 등 구성은 딱히 호기가 생기진 않는데, 노래 때문에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 정도! 같은 의미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듣고 싶어 <잔니 스키키>를 꼭 관람하고 싶다. 꼭! (보고 있나, j씨?)



오페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인데 <방구석 오페라>를 통해 대략 어떻게 흘러가는지 얕은 지식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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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기준이 되지 않도록 - 부러움을 받으면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당신에게
윤현 지음 / 홍익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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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자신을 잘 안다고 자신하는 것이 착각일지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그 믿음이 어리석음에 가닿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날것의 내 감정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던 지난날들을 고작 어리석음으로 점철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는 ‘지금의 내 상태’를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나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나는 침묵을 택하게 되었다. 이전의 나라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다. 누군가에게 내 상태를 말해야만 속이 풀린다고 믿었으니까.



개인적인 일기가 아닌 타인이 볼 수 있는 글을 쓸 때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혼자 기록하기 위한 글이라면 내가 언제나처럼 끄적이는 연습장에 있는 단어들만 난무할지 모른다. 가장 최근에는 “개구리가 야옹거리면서 풀벌레에게 기댔다. 그러니까 당신은 갈대가 아닐까.” 이따위의 말도 되지 않는 문장들을 써재낀 적이 있는데 이건 단순하게 그때 당시에 생각난 단어들로만 조합한, 정신세계가 모호하다고 판단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장이니까. 이런 조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내가 나에게 비웃음을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글도 읽히기 위해, 누군가에게 도달하기 위해 쓰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그것도 전체 공개로, 저런 글을 쓸 수는 없는 거니까.



어떤 것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때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둘 이상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었고 어쨌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럴 때 선택의 기준점에서 남들 시선은 늘 배제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아니 어쩌면 이 삶을 살아가면서 남들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남을 의식하고 있으니 내뱉는 말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우리는 남들의 시선을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살아야만 하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글을 쓰다보니 타인의 시선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무단횡단을 하려고 할 때에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멈칫하게 되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려다가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거두게 되기도 하며 쓰레기를 버리려다가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이 없다면 우리는 금지된 행위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하지만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내 기준이 제대로 확립되어야 타인의 오지랖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삶을 살아가면서 자주 질문란에 있는 성적, 학교,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등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를 지지해주는 부모님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또 주변 지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한 뒤 남부럽지 않은 결혼을 하고 아들딸 하나씩 낳고 살면 그게 성공한 인생일까? 그것을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본인의 만족이 없다면 그것 역시 결핍으로 촘촘하게 채워진 인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왔다. (체념의 의미는 아니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인생이고 이것도 인생이고 저것도 인생이겠거니 싶다. 인생은 한번뿐이니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그렇게도 살아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불과 3-4일 전에 한 카페에서 한 글을 봤다. 그 사람이 하는 생각을 나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체가 보는 공간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는 저러지는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느낀 것은, 추해보인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발설하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한번도 내가 계획하지 않은 삶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내가 계획한대로 살아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내가 계획할 수 없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내 삶에 침입한 수많은 무계획들이 나를 괴롭혔고 그때마다 나는 자주 넘어지고 깨어지고 부러졌다. 유연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무계획 속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까마득히 멀어진 것만 같은 내 과거를 회상하게 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때의 선택을 지금도 똑같이 하게 될까? 하고 생각해보면 답이 달라지는 것들도 꽤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나는 아직도 점점 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크고 있네, 나. 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보듬어주게 된다.









책 속의 문장


8. 이제는 지난날들로부터 그리움보다 깨달음을 느끼려한다. 부러움을 받는 것과 행복의 차이를 찾아가던 날들. 삐뚤삐뚤 서툴렀지만 나답게 사랑하던 날들. 낯선 세상에 부딪히고 도전하던 날들. 그속에서 삶의 '기준'을 배운다. 적어도 내 삶에 결국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기 위해.


190. 살다 보면 쌩쌩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처럼 수없이 많은 관계와 상황이 우리 삶을 스친다. 때로는 그 스침이 안타까워 전부 다 붙잡아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조금씩 기준을 세워 본다. 흘려 보내야 할 군더더기는 무엇인지, 내 곁에 꼭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말이다. 언젠가 길을 잃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에 갇히더라도 결국 지켜내야 할 소중함이 끝내 우리에게 길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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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어른의 하루 -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인생 문장 365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
조윤제 지음, 윤연화 그림 / 청림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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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도와 습도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곁에 서는 것도 싫었던 계절도 가고 마음이 가는 만큼 조금씩 가까이 서도 좋을 계절, 가을이 왔다. 가을을 느낌과 동시에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내가 나를 얼마나 키워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나는 간헐적으로, 아니 아주 많이, 내가 어른이 덜 되었음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어쩐지 어른을 흉내 낸 어린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그걸 한번씩 깨달을 때가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린아이일 수는 없고, 하지만 세상의 부조리함에서 나는 벌써 어른인 것만 같은데 그건 어른인 척하는 것 같을 때.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말이다. 경계에서 나는 어른도 되었다가 아이도 되었다가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내게는 소망이 하나 있다. 나이에 걸맞은 사람은 되고 싶다는 것.

그러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어디에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을까.





<다산, 어른의 하루>는 심경, 소학, 논어, 맹자, 도덕경, 중용 등 수많은 고전을 읽고 남긴 성찰들을 조윤제 작가가 엄선해서 엮어둔 만년 일력으로, 365일 달력에 맞춰 하루의 명언처럼 글이 쓰여있다. 이 글들을 어떻게 마음에 새길까 생각해보다가 나는 이 명언들을 필사하고 있다. 매일매일, 하나씩. 1월부터 12월까지 주제를 정해서 테마에 맞게 죽 이어나가고 있는데 필사를 하다보니 다음날의 명언이 궁금해도 그날의 명언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다음날이 되면 얼른 펼쳐보는 재미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달력에 동양화가 그려져있는데 그 꽃들을 보는 재미 역시 상당하다.




어떤 좋은 글이라도 내 상황에 맞지 않으면,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깨어지고 흩어지기 마련인데 필사를 하다보니 언젠가 다시금 흩어질 것이라 하더라도 그냥 눈으로 흘리는 것보다 내밀하게 마음을 간질인다. 필사를 할 때 글자만 적는 것이 아니라 한문도 함께 적고 있는데, 꾹꾹 눌러쓸 때마다 내가 조금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문장들이 내 마음에 깊이 머무를지, 또 어떤 문장이 내게 힘이 되어줄지 사뭇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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