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사나이 -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기홍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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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에 발 들여놓을 수 있는 건 아직 그곳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야.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음미하는 거야. 막 책장을 넘기기 직전의 설렘과 기대, 한 발짝씩 내디뎌 갈 때의 즐거움 같은 걸 말이지. 정복의 쾌감만을 생각하는 건 수집가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시간의 힘을 이기고 살아남은 진짜 책들은 각 분야에 그리 많지 않아. 그러니까 이미 넘겨버린 페이지들을 아쉬워하면서 천천히 읽으라구.” _ P105-106

 

 

 

 

가지고 있는 책들 중 선물받은 책들과,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제한 후 몇 권의 책을 팔고, 오랜만에 책구입도 할 겸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을 찾았다. 참 오랜만에 가는 서점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금세 포근해져온다. ‘내가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책을 많이 찾는구나. 내가 그동안 너무 책을 등한시했었네.’하는 자괴감을 가진 채로 책들을 훑었다. 그 중 저자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마주했고, 책장을 뒤적거리는데 쳐져있는 형광펜. 얼마나 좋으면 형광펜을 다 그었을까,하며 읽었고, 순식간에 그 문장이 가슴께에 콕 박혀버렸다. 어느 순간 나는 책을 읽을 때 형광펜보다 포스트잇 플래그를 더 애용하게 되었다. 금세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하지만 그것은, 그저 책에 낙서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읽으며 긋고싶어,라는 때아닌 욕심으로 형광펜이 그어져있지 않은 다른 책을 찾아서 구매했다. 이 책과의 인연은 그러했다.

 

 

 

 


형 전 말이죠, 세상이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찬 무의미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필요 이상으로 시끄럽고 복잡하고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수연이를 알게 되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애는 제게 의미의 시작이었다구요. 제가 이 세상에서 다른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있따면 그건 그애덕분일 거예요. 그건 마치…… 그건 마치 코기토 같은 거예요. 데카르트의 코기토. 데카르트한테는 그게 모든 진리의 기초였잖아요.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_ P121

 

 

수연,은 ‘나’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런 수연을 위해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찾아나서고, 이야기의 무대가 런던으로 바뀌면서 ‘나’의 발걸음이 전보다 빨라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나,도 조급해했다. 런던으로 간 후 ‘피리부는 사나이’를 찾는 일에 헛걸음치는, 반복되는 이야기들에 루즈하다, 느껴질 즈음 ‘나’는 헉씨를 만나고 니콜라스를 만나게 된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한 김기홍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태동되었다. 작품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내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이렇게까지 쌩뚱맞을 수가 없다. 달짝 지근한 연애가 살짝 담궈져있는 성장소설인줄 알았다가, 추리소설인줄 알았다가. 끝끝내 책의 성질을 꼬집지 못하고 나는 이 책을 ‘김기홍’이라 부르기에 이른다. 우회적이지 않으면서 우회적인 그의 문장들은 내게 우호적으로 다가왔고, 결국 그것은 매력적이다,에 미친다. 작가의 사색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이 책은, 내가 이렇게까지 아껴가며 읽은 책이 언제 있었던가,싶을 정도로 여유를 부렸지만, 그러면서도 조급해했다. 그저 작가의 템포에 맞춰 같이 걸어가면 될텐데 나는 여유로운 척,을 해댔으니 말이다. 이야기일줄 알았던 남은 페이지가 심사평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깨닫는 순간이었으며, 이야기 결말에서의 아쉬움이 아닌, 이야기가 끝이 났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 남은 페이지가 심사평이라는 사실에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말을 두어 번 더 읽은 후에 이야기가 어디까지 더 전개되길 바랐던 것인지. 남은 페이지가 고작 심사평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야금야금 읽을 수 있었을까,하는 아쉬움일 게다. 또한 심사평의 몇 줄을 읽으며, 책을 덮고 표지의 ‘제15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을 발견했고, 놀라서 옆에 있던 J에게 “이게 이 작가 당선작이래!”라며 쫑알쫑알거렸다. 이후에 기대감으로 다른 작품이 있었는가 찾아보았지만 이 작품이 그의 최신작이라는 사실은 아쉽게만 느껴진다.

 

 

 

“이 책 괜찮은가요?”라고 묻는 이에게는, 장르가 확실한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라면 “당신의 혹평을 기대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책에는 문학, 철학, 미술,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조금은 현기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내겐 참 괜찮았던, 괜찮은 책,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라고 마무리해본다. 이보다 더 주관적일 수는 없으니까.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또다른 세계를 향해 걷기 시작한 ‘나’의 발을, 참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 수연, 우진, 정현, 이반. 그리고, 피리부는 사나이. 안녕. 나는 이제 내 안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만나러 가야겠다. 어쩐지, 나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들려주는 연주는 요람에서 빽빽거리며 울고 있는 아기가 금세 잠이 들 정도로 평화로웠으면, 참 좋겠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한번 형성되고 나면 그 양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번 생겨난 물길을 바꾸려면 커다란 고사가 필요하듯 일단 관계에 일정한 흐름이 생겨나면 그 흐름은 특별한 노력 없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_ P27

 

 

그러한 대화의 구도, 우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내겐 더할나위없이 아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마치 생활의 번잡한 일들 따위는 전부 사라져버린 것처럼 한없이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_ P73

 

 

수연과 나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비할 데 없이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거대한 망각의 바다로 흘러가버린 대화가 있는가 하면,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섬처럼 남는 대화도 있었다. 시간이 쌓여가며 깨닫게 된 것은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지금은 대부분 잊혀져버렸다. 어쩌면 그중 일부는 기억하고 있되, 그것을 중요하게 느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 반복되는 말버릇, 사소한 몸짓이나 표정 같은 것들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기고 살아남아 수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의 웃는 방식, 이따금 내게 눈을 맞출 때의 표정, 그녀의 말이 갖는 독특한 리듬, 그런 것들. _ P83

 

 

“버렸다는 말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형은 그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_ P113

 

 

“사람들은 대개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신경쓰니까. 차이점들이 하나하나 벽으로 변하는 거지” _ P117

 

 

“오해받는 것도 싫지만 오해를 내 입으로 해명하는 일은 더 싫어. 해명이란 건 하면 할수록 오히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꼭 믿어주는 것도 아니잖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고.” _ P136

 

 

혼자있을 때 인간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친구도, 가족도, 연인도, 다른 누구도. 어쩌면 우리가 외로운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_ P139

 

 

“너는 부재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이해해야 해. 우진이는 너에게 어떤 존재였지? 이제 우진이는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해. 그걸 이해하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야.” _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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