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6
페터 파이스트 지음, 권영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아름답고 아름답다. 내가 이토록 찬미할 수 있는 화가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의 그림은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순간적 마주침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와 그의 그림이 조우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07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학이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으로 08년, 학교가 개강한지 두어 달만에 후회를 느끼고 한 해를 그저 흘려보냈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을 했다고 했지만 내 손아귀에 잡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던 때었다. 그래서 작년(09년) 학교에서 졸업이란 순간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학구열에 불타오르고 있을 즈음, 도서관을 꽤 자주 들락날락했었는데 도서관에서 파묻고 있던 고개가 아파와 신경질적으로 쳐들었을 때, 그때 내 눈 앞에 있던 것은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 그때부터였다. 그의 그림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순간이. 그때 만난 것은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인상주의 화가들」- 그의 파트만 살짝살짝, 야금야금 보고 있는 - 이나, 아이잭 신의 「르누아르와의 약속」 두 권 다 괜찮은 책이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다.

 

 

 

이게 왠 떡인가! 그때 마침, 서울에서 ‘행복을 그리는 화가 : 르누아르’ 라며 르누아르전이 한창이었던 것! 작년 여름전까지만 해도 서울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20대를 정해진,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라는 지역에 갇혀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고 있던 나였음에도 그곳을 찾아가려 무던히 애를 썼으나 시험, 졸업작품에 파묻혀 결국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더랬다. 그러니까 입에 물어준 떡도 먹지 못하고 바닥에 흘려버린 셈이다. 그러고서 올해 1월에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라는 전시회를 간 것은 꼴랑 5점인 르누아르 그림이라도 보러 가겠다며 눈 오는 날에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었다. - 그와 함께 동행했는데, 아마 그는 내가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을터. 큭큭 - 어찌됐든 작년 이것저것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와 모진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 즈음 그런 나에게 지인이 이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방방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 것이 참 좋아했구나 - 라는 말을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게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난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따뜻한 동화같은 세상의, 동화같은 사람들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뿐이었던게다. 업무에, 사람에, 공부에, 또 나 자신에게 시달려 마음 언저리에 찬 바람이 스며들 때 그의 그림을 펼쳐드는 동시에 곧 내 앞에 그가 그린 동화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그저 그림에 현혹되었던 게지.

 

 

 

늘 그림만 보아오다가 그를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전 「페르난도 보테로」를 읽었기 때문. 번역기를 돌린 것이 완연하게 티가 나는 그 글을 읽고 있자니, 이건 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고, 죄다 무표정인 뚱한 사람들의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 아, 보테로의 그림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은 ‘돼지 머리가 있는 정물’ 에서 웃고 있는 돼지뿐이었으니, 나 또한 그들을 따라 어찌나 끝도 없이 무표정해지는지 볼썽 사나워졌더랬다 - “그림은 항상 즐겁고, 유쾌하고, 예뻐야 한다” 라는 말을 한 르누아르의 그림이 간절해지더라, 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손에 착 감기는 이 책을 잡고 그림이 아닌 행복을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를, 그를 읽었다. 그는 부유층을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중하층 보헤미안들의 일상적인 즐거움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림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그도 표피적인 묘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내키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고 - 그것을 책에서는 르누아르의 타고난 순박함 덕분,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검정이라고 하면 생기 하나 없는 죽은 색,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그 검정색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붉은 색과 파란색을 섞어 사용했는데 그 예로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소녀’ , ‘물랭 드 라 갈레트’ , ‘그네’ , ‘두 자매’ , ‘검은 옷의 두 소녀’ 등등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래서 어둡게만 보이지 않는 까닭이 그것인가,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게다가 그의 그림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델은 대부분 르누아르의 부인, 아들들, 동생부터 그의 지인들까지 다양하다. 그것은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그곳에는 그가 알고 지내는 지인들 모두가 그 그림의 모델이 된다. 이 그림의 첫 인상은 무질서와 혼란인데, 그로 인해 그림이 살아있다 - 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욱 인상깊은 것은 책에서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었는데, 마로니에북스라 하더라도 지은이, 번역가에 따라 느낌이 이리 달라질 수 있다니…. - 내가 좀 더 애정깊이 본 까닭도 있을테지만 - 그림에 대한 설명 한톨도 없던 보테로와는 달리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도슨트를 듣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는 점.

 

 

 

그러다가 그가 많이 아팠다는 글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르누아르와의 약속」에서도 접했는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악화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뼈가 비틀리고 피부는 말라붙었다. 1904년에는 몸무게가47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앉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1910년 이후에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했으며, 휠체어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르누아르의 손은 심하게 비틀려 새의 발톱처럼 휘었으며, 거즈 붕대를 감아 손톱이 살에 파고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 이상 붓을 쥘 수 없어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면서도, 증세가 악화되어 침대에 눕지 않는 한 매일 그림을 그렸다. 침대에는 철망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불이 몸에 닿지 않도록 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는 때도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린 그림조차 행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송가였고, 천국의 미소였다. 며 여보게, 그림을 그리는 데 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네.” 나는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르고 제대로 그려본 적 없으며 배워본 것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라고 말할 정도로 무지한데도 이 글에서 손 끝과 발 끝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행복하게만 보였던 그림,을 그린 그,의 노년을 보는 것이 내가 모르는 또다른 삶을 엿본 기분이랄까. 그의 화가 생활을 읽어내리며 엔드다, 엔드.를 읊조린다. 그가 그린 그림이 모두 행복할 거라는 착각은 이제 엔드,를 뜻하는 것인지, 그를 읽는 것이 엔드라며,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보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 것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 비가 오는 오늘에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이다. 커피 한 모금에 그의 그림을 담고, 두 모금에 그의 삶을 담는다. 자연은 예술가를 고독하게 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고 싶다.”던 그는 안녕하신지. 하늘에서 또 어떤 동화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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