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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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으음, 염소 한 마리!”

“한 마리요? 난 염소를 세 마리나 버리고 왔어요. 어쨌든 아주머니가 나보다 덜 억울하겠어요.”

“덜요?”

“아주머니는 염소를 한 마리만 버렸지만 나는 세 마리나 버렸으니까요.”

“내 염소가 얼마나 포동포동 살이 쪘는데요.”

“내 염소들은 부지깽이처럼 말랐을까봐서요?”

(…)

한 마리 버린 사람도, 세 마리 버린 사람도, 자신이 가진 염소를 전부 버렸으니 누가 더 억울한지 따지는 건 우습고 부질없어……

누군가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넌 그래도 누구보다 낫네. 누구는~”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반발심만 올라왔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는데 그 표현을 이곳에서 찾았던 기억이 난다. 슬픔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에 이 책을 읽다 눈물이 자꾸만 나는 유약한 마음에 금세 덮어버리고 수개월 동안 엄두가 나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다시 처음부터 읽어갔다.

12. 오줌 지린내, 눅눅해진 건초가 썩는 냄새, 구릿한 살냄새, 케케묵은 목화솜 냄새, 땀과 때에 찌든 옷 냄새, 보드카 냄새, 담뱃잎 타는 냄새, 염장 청어 냄새가 뒤섞여 열차 공기 중에 떠돈다.

1937년 소련에 의해 조선인 17만 명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던, 정체성이 없는 상태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이 책을 통해 감히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집을, 내 고향을, 내 나라에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설움이 만년설처럼 마음에서 녹지 않고 점점 쌓여만 갔다. 아마 여러 지역을 부유하며 정체성 없이 떠도는 나를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열차 가장 먼 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들이 내뱉는 말의 발자국이 마음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다. 그들이 내뱉는 언어는, 행동은 억지스럽지 않고 담담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아내의 심정과 자신을 따라 열차에 탑승한 러시아인 아내를 보는 남편의 심정도, 아이를 열차로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도.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삶을 사는 걸까, 살아내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끝내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살기도 하고 살아내어야 하기도 하며 살 수밖에 없기도 하여 애달프다.

어쩌면 삶은 용변의 자유로움과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에서도 안락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136. “얘야, 참새들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참새들은 늘 그렇게 신이 나 있는 거란다.”

참새와 인간은 다르니까요,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253.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데요?”

“왜요?”

“네, 왜요?”

“살아 있으니까요.”

“살고 싶잖아요.”

우선 살고 봐야 하니까.

그저 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사람들이기에.

117. “제비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갔겠지요.”

“봄이 오면 또 날아오겠지요.”

“네, 사랑을 하려고요.”

“우리가 떠난 것도 모르고요.”

우리는 어디엔가 씨를 다시 뿌린다. 씨를 뿌리고 그 작물을 수확하며 그것을 먹고산다. 그것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유보하기로 한다. 살아야 하는, 살아내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삶이라고 다 같은 삶이 아니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의 삶.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엾음을 알기에 마음이 혼란하다.

108. “여보, 지난 일이야.”

“지난 일이요? 가슴에 남아 있으면 지난 일이 아니에요.”

한국사를 단편적으로 공부를 했던 지난겨울의 한 달이 있었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보다 나의 얄팍한 지식에 한탄을 하며 공부를 했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주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모르는,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혹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곰곰이 따져보면 나는 한국사를 다시 단편적으로나마 들추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간만이라도 몸과 마음 모두 멀리에 있는 그들을 생각하게 되니까.

다시 앞장으로 돌아온다. 내 새끼들, 먹을 복이 있어서 평생 배불리 먹고살아라. 울컥, 고요해졌던 마음이 이내 다시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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