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한 권에 거의 이십여 일의 시간을 들였다.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허비했다와 소비했다 중 한 단어를 고르려다가 시간을 들였다.라고 끝맺음을 지어본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청소년기를 껴안아주지 못하는 고약한 어른이 되는 것만 같아서인데, 그것과 동등하게 나조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을, 기꺼이 껴안아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있지.’라고 짐짓 젠체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답답함이 머리에서 어깨를 지나 무릎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얼른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바운더리가 학교 기숙사였을 때 홀든은 궁금증을 품기 좋은 상대였는데, 그 바운더리가 무너지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홀든을, 나는 자주 내버려 두곤 했다. 그를 술집에, 택시에, 클럽에, 호텔에, 그대로 감금시켜버리기도 했다. 그와 발걸음을 함께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기 때문에 그렇게 당분간 그를 버려두고 청정한 공기를 맡고 싶었다.

그는 굉장히 어긋나있는 상태였다. 그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허약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허영과 오만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제멋대로 내 머릿속을 침범하여 나를 괴롭혔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조차도 그는 내게 힘들고 어렵고 버거운 상대였다. 한 마디로 찌질한 남자애였다. 너는 상대도 안 되지, 덤벼봐! 라고 해서 발로 툭 찼더니 픽 쓰러지는 그런 남자애.

204. 가면서 계속 울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울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허둥지둥, 우왕좌왕, 얼렁뚱땅, 갈팡질팡인 그를, 마지막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의 허영을 비웃음으로 일관했는데, 그의 고백을 같은 방식으로 일관해서는 안 됐다. 아직 나는 덜 큰 어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누군가의 고백을 짓밟을 만큼 옹졸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갑자기 정(情)이 생겨서 그의 방황을 인정하는 일은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존중은 해주고 싶었다. 곁에 두기엔 여전히 버거웠기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앨리가 좋아.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해.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여동생 피비가 그에게 무얼 좋아하는지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간신히 몇 가지를 늘어놓는다. 피비가 재촉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그게 온전히 그가 좋아하는 것들일까? 그에게 숨 쉴 구멍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면서였다. 고작 세상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 따위를 숨 쉴 구멍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던 그를 측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는 세상에 만연해있는 속물을 경멸하며 순수를 좇지만, 순수는 점점 더 줄어들어 그가 본 것은 고갈 상태의 순수뿐이었을 것이다. 순수함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점을, 그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니까, 간절하니까, 그래서 어떤 건 끝까지 가보아야 알 수 있는 법이니까.

229.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그건 시야. 로버트 빈스가 쓴 거잖아.

230.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10대에 걸맞은 순수함이 있고,

20대에 걸맞은 순수함이 있고,

30대에 걸맞은 순수함이 있고,

+0대에 걸맞은 순수함이 있다.

그 나이에 맞는 순수함은 시기가 도래하면 한편에 예쁘게 포장해서 넣어두고 우리는 지금을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을 부르며 연석을 걷던 아이를 보며 기분이 나아짐을 느끼던 홀든처럼, 그 순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며 그때의 순수함을 몰래 꺼내어 들여다보고 닦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책의 끝에 다다라서야,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지키고 싶었지만 지킬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아쉬움과 후회를 구태여 동반해야 하는 것이 돼버린다면… 나는 조금 덜 후회하기 위해 현재를, 오늘을, 지금을, 순간을 살아야겠다며 이제 기지개를 편 가을바람을, 가을냄새를, 가을햇볕을 좀 더 입가에 머금는다. 나 역시 아직도 여전히 세상을 방황하며 허겁지겁 살고 있는 중이지만, 나는 홀든보다 아주 조금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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