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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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은 읽어본 분들 사이에서 호평을 자주 들었기에 언젠가 읽어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다렸다. 책을 읽기 전부터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를 하며 따듯한 차를 한 잔 타두고 평소와 다르게 예의를 갖추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도중 어쩐지 나는 자꾸만 답답해졌고 책을 덮고 싶었고 급기야 책을... 버리고 싶었다.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마다 깊은 절망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도.대.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에 대하여 전과 다르게 책에 대한 내 마음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타인의 서평들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 한 권의 책에서, 여러 편의 이야기에서, 반감을 느꼈고 증오를 느꼈고 혐오를 느낀 직후였으니까.

 

 

 

 

마음을 가다듬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차분히 마음을 달래보고자 하였지만, 쉬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천천히, 하나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무진기행> : 어둡던 자신의 청년을 상기시키는 무진, 희중은 현실에서는 능동태로 살고 있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무진에서의 생활에서도 문장이 죄다 수동태라는 걸 느꼈다. 무진의 명산물은 안개라는데, 그 안개는 결국 그의 몽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가 지어내는 꿈. 왜냐하면, 무진에서는 11.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으니까.

 

<생명연습> : 두 사람의 이야기다. 유학을 가기 위해 사랑했던 여자를 강간하면서 사랑이 식어감을 느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학을 떠났던 남자는, 삼십 년 후 그 여성의 부고를 듣는다. 아버지가 사망 후에 아버지를 닮은 남자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급기야 죽이자고 나와 누나에게 말하던 형의 종말.

 

<서울, 1964년 겨울> : 우연히 만난 세 남자. 그중 한 남자는 급성 뇌막염으로 사망한 아내의 시체를 돈을 주고 팔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 돈을 다 써야겠다고 하지만, 돈은 남았다. 남은 돈은 불이 난 곳에 던져 버렸다. 밤새 같이 있어 달라던 남자의 부탁을 거절한 두 사람은 다음날 전날의 그 남자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야행> :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을 사칙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게 될까 봐,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는 여자. 그런 지리멸렬한 삶을 살던 어느 날, 한 남자에게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가 강간을 당한 여자는, 이후로도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주기를 기다린다. 130. 그 여자가 바라는 것은, 그렇다, 파멸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속임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게, 해방이었을까. 세상은 다양성이 존재하기에 틀린 것이 없고 다른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지만, 그걸 다르다고 인정하게 된다면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역사(力士)> : 창신동 판잣집 생활을 하다가 양옥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로, 양옥집에서의 생활을 빈 껍데기의 생활, 방향이 틀린 생활, 습관적인 생활이라며 이중성을 못 견뎌 하지만, 창신동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 창신동에서 만난 서씨를 생각한다. 재산이자 가보, 영광으로 내려온 그의 힘은 막노동에서 보수를 좀 더 벌게 하는 것일 뿐이지만 그는 그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동대문 성벽의 금고만 한 돌덩이를 드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 힘이 유지되고 있음을 명부의 선조에게 알리고 있는 게 전부였던 서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163 “내가 틀려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있기에 나는 그 청년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볼 수도 있었다.

 

<차나 한 잔> : “차나 한잔 하러 가실까요.” “저어, 나가서 차나 한잔 하실까요.” 같은 말이지만, 두 문장의 어투와 심경은 다소 다르다. 차나 한 잔 하자는 것은, 일종의 추파로,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을 여실히 그려낸다. 208.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현재 우리의 삶이 당시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미래에 대한 안개는 언제쯤 걷히는가.

 

<그와 나> : 서울행 기차칸에서 ‘감고 있는 눈꺼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양심’에 대해 언급하던 남자,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그들.

 

<염소는 힘이 세다> : 234.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그러나 염소는 며칠 전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아저씨는 우리 집의 밖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아저씨는 힘이 세다. 힘이 약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246. “너 왜 그러니?” 누나의 입에서 짜장면 냄새가 풍겨 나왔다. “더러워”하고 나는 말했다. “더러워, 저리 가!” 누나가 내 양쪽 어깨를 자기의 두 손으로 아플 만큼 눌러 쥐었다. “아무것도 아냐. 나도 취직할 수 있을 뿐인걸.” 누나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나는 힘차게 어깨를 흔들어 누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켜가며 빨리빨리 걸었다.

 

<건(乾)> : 빨치산들의 습격이 있었고, 그날 빨치산 하나가 죽었다. 그 시체를 치우기 위해 아버지와 형과 형 친구들, 그리고 내가 동원되었다. 지나가는 윤희 누나를 보며, 270. “저거…… 우리…… 먹을래?” 내가 좋아하는 윤희 누나에게 형의 말을 전달해야 했던, 무서운 음모에 가담했던 날.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 그것은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혼잣말로 하는 남자의 고정관념들을 따라가 읽는다.

 

<다산성> : 벌레, 이 어둡고 두꺼운 대기층의 밑바닥에서 촉각을 허망하게 내휘두르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두 마리의 못생긴 벌레

 

<서울의 달빛 0장> : 탤런트였던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점과 이후 알게 된 인공유산에 대해, ‘아내는 나에게 도깨비들이 실컷 뜯어먹다 싫증이 나서 던져준 썩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증오를 지니게 된다. 445. 처녀가 아니니까 외설스럽다.던 이야기는 이 책의 전반에 깔려있다. 난생 처음 보는 음부의 추악한 모습에 나는 구토증을 느끼면서 여러 여자와의 성관계에서 아내의 음부를 잊지 못한다. 마치 아내의 음부가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책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역사>와 <차나 한 잔>이었다. 하지만 반감으로 압도되고 그로 인해 부담스러운 단편들에 좋았던 단편들이 묻혀 부정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문장들이 담백하거나 유려하다 따위의 것들은 전연 느끼지 못했고, 나에게 이 책은 여성이라는 성이 얼마나 짓밟힐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다양하게 읽히기만 했다. 1960년대 시대상은 이따위 일들이 만연했었나 보다,에서 그치지 못하고 그에 따른 불편함에 욕지기가 낮게 흘렀다. 윤간, 강간, 겁탈, 능욕, 성매매가 아니면 그리도 쓸 이야기가 없었나 싶기도 했다. 마치, 사랑을 잘못 배운 소년에서 그치게 된 한 남성의 일대기를 읽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욕구를 방출하고 쾌락을 느끼기 위해 이 책이 쓰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피어오르며 씁쓸하다 못해 간담이 서늘해졌다. 같은 이유로 나는 더 이상 박범신의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이유였다.

 


 

 

지금이라면 이런 내용들이 결코 쉽게 출간되지는 못했을 텐데, 단지 한국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들을 당연하다 여겼던 멍청한 사고방식을 지녔던 시대에 쓴 글들이 독자들에게 아름답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이 책을, 지금의 20대 혹은 30대의 남성이 썼다고 해도 아름답다고 말하며 읽을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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