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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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엄마한테 뭘 기대해?”

“아니. 엄마는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어.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설명도, 사과도.”

“그럼 엄마를 용서했어?”

 

용서… 거창한 말이다.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겠다고 저자가 열네 살에 집을 떠난 엄마.

저자는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책을 읽기 전, 나는 내가 용서를 해야 하는 대상을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도중에 우습게도, 그동안 미워했고 싫어했던 대상들에게도 용서라는 단어는 적절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분명 나는 그들에게서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고, 분명한 것들로 인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용서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왜 자꾸만 불편했을까. 그렇다고 화해의 대상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오간다고 하더라도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니까. 도대체 용서라는 것은 무엇이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오히려 책이 질문을 던진다.

1.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2.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3.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사랑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망각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세 가지가 결합되어도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것도 있고, 세 가지 모두가 적용되지 않아 용서를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심지어 기억이 망각되거나 미화가 됨에 따라 혹은 시간의 지남에 따라 혹은 자신의 여러 경험들에 따라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이해를 하게 되고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뒤늦게라도 용서를 하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이런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다니.

 

 

 

16. 용서는 말 그대로 하자면 복수와 보상의 포기다. 용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념하고, 중지하며, 꾸짖기(가리키고 알리기)를 멈춘다. 상처를 가리키는 손이, 타인을 향한 책망이 용서와 더불어 끝난다.

책을 읽으며 어려움을 느꼈다. 용서라는 개념을 알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서가 철학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는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는 애매모호함에서 왔다.

 

책에서는 죄 사함과 용서를 비교하고 있는데, 죄 사함(=사면)은 오직 성직자 혹은 신의 영역이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다운그레이드 된 용서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한다. 영화 <밀양>을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 책의 소개평에 쓰여있는 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딸을 죽인 범인이 이미 자신은 신에게 사면을 받았다고.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사면을 받았다니. 영화를 봐야만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영화를 위시 목록에 넣어두고 조만간 보려고 한다.

 

나는 그보다는 화해와 용서의 개념을 정립하고 싶었다. 어떤 행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순간부터 그 행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라는 그 말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화해는 하고 싶지 않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용서는 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마음이 삐죽거린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용서라는 것은 단순하게 복수와 보상의 포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이다. 단순하게 복수와 보상의 포기라고 한다면 나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상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게는 용서를 함으로써 얻는 보상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책의 논리를 인용하자면 용서가 아니다.

 

“제가 만일 ‘나는 네가 용서를 구함으로써 변화되었고 더 이상 전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하에서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용서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순수한 의미에서 용서하는 사람은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보상을 포기한 것이 유익한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반드시 의도가 있는 경제적 채무 탕감과 달리 용서는 철저히 무목적적이다.

 

 

그렇다고 그게 용서가 아닌 것은 아닌데. 그럼 그건 용서가 아니라 무엇으로 칭해야 한단 말인가. 아, 책의 제목과 꼭 같다. 조금 불편한 용서_

 

 

 

책을 읽으며 용서라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상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마음가짐이 다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 이해할 수도 있고 지금은 사랑할 수 없지만 결국에 사랑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며 지금은 생생하지만 기억이 희미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생생하지만 용서를 할 수도 있다. 용서는 오롯하게 개인의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이 그것을 종용하거나 억지를 부릴 수 없는 문제다. 어쩌면 용서는 딜레마와 같을지 모르겠다.

 

 

책의 끝에서 저자는 결국 엄마를 용서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의 생일에 초대한 엄마가 와서 환하게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초대를 한 것도, 올까 안 올까를 궁금해한 것도,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것도 모두 한 사람이라는 것을. 따라서 저자에게 엄마는, 용서의 존재가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책 속의 문장

 

21.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용서를 요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21.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만이 용서다.

 

22. 화해의 과정에서 상처를 봉합하는 것

 

전체주의 정부의 등장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중요한 사건인 만큼 전체주의를 이해한다는 말은 무언가를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가능한 세상과 화해한다는 뜻이다.

 

81. 이해를 하면 무조건 감수해야 할 때보다 견디기가 수월하죠.

 

133. 용서할 수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한 움큼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습니다.

 

137. 그는 용서란 ‘마음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충분한 거리를 두면 조금씩 진전이 보이죠 용서는 일종의 자기 발견이거든요.”

 

166. 용서하는 사람은 일어났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며, 결코 건망증을 앓는 것이 아니다. 일어났던 일은 흔적으로 기억에 고이 보관된다. 용서를 통해 변하는 것은 이 흔적의 심리적 배역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무거운 죄나 어쩔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그 흔적은 역사적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는다.

 

229. 용서는 포기의 행위다. 용서하는 사람은 보상을 포기한다. 하지만 이런 포기는 그것이 유지되는 동안, 유지될 수 있는 동안까지만이다. 용서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진행된다. 또 용서는 오늘 되는데 내일은 다시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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