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이다안 지음 / 파람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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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여러 감정이 들었는데, 그런 감정 따위들을 다 서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분명 이 글을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내 서평이 그에게는 또 다른 죽음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던 이유는, 세상에 각기 다른 힘듦과 괴로움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다 잘 견뎠다. 하며 위로하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특히나 저자의 나이가 나와도 같았기에 그런 마음이 더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친절하거나 다정한 사람이 아님을 인지해야만 했다.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무척이나 피로했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깊은숨을 한참이나 내쉬었다.

 

 

 

 

 

부모에게 도망치듯 벗어나 들어간 셰어하우스에서 오손도손 잘 지내던 와중에 회사에서는 긴장을 하면 생기는 고질병인 복통이 점점 심각해져 퇴사를 하면서 이야기의 컨디션은 좀처럼 위로 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셰어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죽음이 화두로 올라왔고 그것에 대해 저자는 묻는다.

 

 

"너희들은 왜 살아?"

"나는 누군가가 나를 고통 없이 죽여준다고 하면,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지금 당장 죽여 달라고 할 거야. 너희는?"

 

 

다른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두 번째 문장에서 뜨악했다. 친한 친구가 아니면, 그리고 같은 마음인 친구가 아니라면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공감을 얻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어서.

 

 

 

 

 

그냥 문득 누군가에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 우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다는(P92), 내가 여전히 병들어있는 나약한 환자라는 것을 누구든 제발 알아줬으면 한다는(P148) 부분들을 읽으며 마음 한편이 답답해졌다.

 

 

 

나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본인이 힘든 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의 친구였다. 어느 순간 내가 감정 쓰레기통도 아닌데 그런 얘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쩌다가의 고민, 어쩌다가의 짜증이 아니라 매번 그 소재로 이야기가 귀결되어버리는데 더 이상의 공감이나 응원이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에 너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니가 나아질 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미안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때 내가 그 애에게서 들었던 말은, 실망이라는 말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그 애의 말을 들어주었던 시간들을 후회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 애가 1년 후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고마움을 몰랐던 그 애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애가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내 경우에는 매일매일이 행복인 사람은 괴상했고, 매일매일이 고통인 사람은 부담스러웠다. 사람은 똑같지는 않아도 삶에는 굴곡이라는 게 있어서 기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다는 말을 나는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S나 유선이, L의 행동들을 어렴풋 이해가 됐다.

 

 

 

 

 

 

저자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내게도 저자의 엄마 같은 사람이 가족으로 있기 때문에. "네까짓 게 뭐가 잘났다고. 니가 잘 하는 건 글씨 잘 쓰는 거, 그거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서로를 할퀴어야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가 힘든 것이 싫어 독립을 하며 절연을 택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라는 말은 내게 무용하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몇 번의 시도 끝에 분명하게 알아차렸고, 더 이상은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으며 그와 연결된 다른 가족과도 연락을 끊을 준비가 되어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 분명하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그것을 끊어낼 생각이 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를 무방비 상태로 가만두지 않는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아픔이라는 말에 반은 공감하고 반은 공감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에는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아픔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과정을 보고 나도 나아질 수 있겠다고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저 버티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을 보면서는 오히려 의욕이 꺾였고, 힘들지만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이 됐다. 한없는 그 아픔 속에 나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천천히 의지가 될 때마다 나를 조금씩 들어 올려주어 제대로 된 숨을 쉬고 싶다.

 

 

 

저자는 몇 번이고 살기 싫다고 하고 죽고 싶다고 하지만, 방에서 엄마가 한 음식 냄새를 맡으며 자살 결심을 내려놓는 것은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어쩔 수 없음에서 기인했을지라도, 그것 역시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누구 때문에, 라는 말은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시켜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누구 때문에,라는 말처럼 자신을 연민이 가득한 피해자로 만들어 세상을 보는 눈을 가리는 것도 없었으므로.

 

 

 

 

 

추신.

돈이 없어 아이들 원비를 밀리고 보일러를 낼 돈을 밀려 가스가 끊겼다는 친구에게 일을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친구의 남편은 쓰리잡, 포잡까지 뛴다고 했다.

이후로는 돈이 없다고 할 때마다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라고 했고, 친구는 일을 하지 않을 핑계만 말했다.

언젠가부터 그 친구는 내게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끝까지 모를 것이다.

돈이 없지만 일주일에 대여섯 번 배달을 시키는 친구에게,

돈이 없지만 티비는 60인치를 사는 친구에게,

돈이 없지만 중고차보다는 새차라며 차를 샀던 친구에게,

'그러니까 니가 돈이 없는 거야.'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도와줄 게 아니라면,

친구의 인연을 끊어버릴 게 아니라면,

입을 닫는 편이 나았으니까.

 

 

 

하지만 나조차도 예상할 수 없다.

친구가 이후에도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계속해서 말했다면,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에까지 닿지 못한다.

나는 그 친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추신2.

내 마음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내비쳐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참 번거로운 일이라 느껴진다.

상대방은 정말 위로를 해주었지만 와닿지 않는 말도 참 많았고, 알게 모르게 상처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으로 저자에게 여러 문장을 쓰다가, 어떤 말도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만 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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