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 - 느리게 하지만 선명하게 달라지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김여진 지음 / 빌리버튼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인생의 ‘Rubato’는 언제일까, 생각해보면 너무 명확히 그때였다. 이곳에 와서 적응하며 살아내야 할 때.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헛헛함이 쌓여 고름으로 번졌다. 내가 세상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리로써 표현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느닷없이, 배우자에게 통보했다. “나 피아노를 배워야겠어.”

 

 

나는 피아노만 아니라면 어떤 악기든 상관이 없었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우선 부피가 커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악기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연주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기에 피아노라는 악기는 무리가 있었다.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이올린이나 우쿨렐레나 기타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피아노를 등록한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피아노 학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바운더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피아노를 만났다.

 

 

나는 피아노와는 낯선 관계다. 서먹서먹함을 넘어 짝사랑하다 친구한테 빼앗겨버린 존재가 피아노의 존재였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고 조르고 조르다가 드디어 등록을 하게 되었던 날. 그때의 설렘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일곱 살의 설렘.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누르고 소리가 났을 때 느낀 그 전율. 그런데 그 설렘은 만 하루를 가지 못했다. 피아노를 다녀와서 나는 수두를 앓았다. 며칠을 꼬박 앓아야 했기에 피아노는 고사하고 방안에서만 틀어박혀 지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피아노를 다니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초등생의 나는 속셈학원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안녕.

 

 

그리고 다시, 피아노 안녕.

 

 

 

 

고백하자면, 나는 피아노를 갈 때만 피아노를 친다. 레슨이 끝나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연습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피아노가 늘지를 않는다. 잘 하고는 싶지만,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피아노이다.

 

같은 맥락으로 출석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다녔고 실제로 물속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가장 재미있었던 내가 키판 없이 배영을 하고, 어설프게나마 자유형을 하던 그 희열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크리스마스에 ‘Noel’을 치고 싶어! 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오만 원짜리의 저렴한 피아노를 구매하게 되었다. 노엘도 노엘이지만, 이제까지 배운 것들이 너무 빠르게 잊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웠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집에 있는 피아노를 뚱땅거리지만, 나는 나아지고 있는 걸까. 글쎄......

 

 

 

그런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말이, 얼마나 뻔뻔하고 염치없고 부끄러운 것인지 피아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여실히 느끼게 된다. 110. 오늘은 욕심 부리지 않아. 서툴렀던 부분을 서투르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야. 라는 부분에서 그랬고, 두 마디만 천 번 반복을 한다는 부분에서도 그랬으며, 239. 실수가 잦아지는 구간에서 손가락이 헤매지 않도록 연습하고 곡에 몰입하는 법을 체득한다.는 부분에서 그랬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피아노를 대하고 있는가를 상기할 때마다 부끄러움이 몸을 에워쌌다. 내가 마주 앉아 있는 피아노에게 사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왼손 계이름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만족하지 않아야 실력이 늘 텐데, 나는 이런 작은 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도통 실력이 늘지 않는 걸까.

 

 

 

47. 피아노를 배우면서 잘못을 인정하는 법과 인내심을 다시 배운다.

나 같은 초보자는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악보에서 눈이 벗어나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 틀려버린다. 그럴 때마다 자꾸만 신경질을 넘어 화가 난다. 이건 분명 내 문제이고 피아노한테 화풀이할 일이 아닌데도, 피아노한테 화풀이를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대단한 곡을 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정말 뚱땅뚱땅하며 피아노를 치는 수준, 간단한 동요 하나를 치는데도 그렇다. 이런 내가 다른 곡들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지레 겁을 집어먹는다. 다시 처음부터 한다. 다시, 다시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나를 다독인다. 그래도 안 된다. 계속 틀린다. (휴)

 

 

내가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 스타카토이다. 부드럽게 가다가 통통 거리는 게 이게 뭐라고 난 힘들지? 싶었는데, 48. 화음 스타카토가 너무 어려워요.란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 아!

 

 

 

그리고 작가의 선생님을 보며, 나의 피아노 선생님도 생각났다. 피아노를 생전 처음 배우는 걸 알아서 기초부터 배우는 게 좋겠다고 먼저 말씀해주셨다. 게다가 내가 연습을 안 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리라 씨는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아요. 연습하면 안 되는 건 없어요. 리라 씨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요.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는 것보다 성인이 되어서 피아노를 배우는 게 더 대단한 거예요.”라고 늘 다독여주신다.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한지... 그래서 그런지 자꾸 응석을 부리게 된다. 아마 선생님은 모르시겠지. 내가 선생님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는 것을. (또 몰라야 한다.) 나의 피아노 선생님이 지금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피아노를 계속해서 배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무언가를 할 때에 가르쳐주는 사람 혹은 함께 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작가의 선생님도 만만치 않다. 왜인지, 나긋나긋하게 노래하듯 말할 것 같은 사람.

포르테(f) : ‘세게’가 아니라 ‘건강하게’

83. 호흡하세요. 숨 쉬어요.

88. “시작해볼까요? 털썩 주저 앉는 느낌이에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왕 앞에 나서는데 속으로는 주저앉는 심정으로.”

224. “분명히 이 곡과 어울리는 감정이 있단 말이에요, 여진씨는. 그런데 주춤하고 멈칫하는 게 느껴져요. 여기에 포르테가 있잖아요. 일상에서 포르테를 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더라도 어떡해요. 여기에서만큼은 포르테로 표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쇼팽이 말하고 있잖아요.”

 

 

 

 

162. 나는 ‘울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 진짜 자주한다. 너무 울고 싶다. 명백한 이유를 알 수 없이 답답할 때, 이유를 당장에 찾을 수 없으니 언어로도 구체화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고 그 시점에서 울컥 올라오는 말이 ‘울고 싶다’인 거다. 절대 울지 않아도 그냥 매일 조금씩 울고 싶다. 기본값으로 웃음이 많아 잘 웃는데 속이 울이 많다.

 

작가랑 내가 너무나도 동일시되던 부분들1.

나도 울고 싶다라는 말을 정말 자주한다. 왜 울고 싶냐고 물어보면, 복잡한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라고 대답해왔다. 그런데 그때마다 울어버린다면 나는 매일매일을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가 돌멩이에 발이 채이면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기껏 시간을 들여 반찬을 했는데 그 반찬이 맛이 없어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어떤 때는 공들여 화장을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말이다. (뭐, 사실은 그런 이유들로 운 적도 있음을 살짝 고백한다.) 근데 이런 사람이 또 있다니... 세상에...

나는 며칠 전 배우자가 술을 많이 먹고 들어온 날, 그 새벽에 샤워를 하고 수건을 욕실 앞에 두었는데 그걸 보고 울고 싶었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세상에 울고 싶은 일은 많지만, 그 어떤 일이 마음을 온통 흔드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울고 싶다.

 

 

 

164. 공허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으면,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166. “일도 해야 하고 원고도 써야 하고 피아노 연습도 해야 하고 사이버 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복학을 해서 인터넷 강의도 들어야 하고 할 게 진짜 많고 힘들어요. 피곤해요. 그런데 불행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작가랑 내가 너무나도 동일시되던 부분들2.

누가 나한테 일을 하라고 한 것도, 책을 읽으라고 한 것도, 글을 쓰라고 한 것도, 피아노를 배우라고 한 것도, 꽃꽂이를 배우라고 한 것도, 수영을 다니라고 한 것도, 한자 공부를 하라고 한 것도, 필사를 하라고 한 것도, 독서노트를 쓰라고 한 것도, 일기를 쓰라고 한 것도, 가계부를 쓰라고 한 것도, 도서관에 가라고 한 것도, 강제저축을 하라고 한 것도, 영화를 보라고 한 것도 (…중략…) 아니다. 그럴 사람도 없다. 나의 배우자는 내가 무엇을 하든 지지한다. 강요를 하는 것도 없고, 조언은 내가 원할 때에만 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내가 자처한 것이고, 내가 벌린 것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할 게 너무 많아서 힘들고 피곤하다. 할 게 많은데도 이외에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진짜 울고 싶다.

근데 아이러니하게,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즐거울 때도 많다. 개중에는 억지로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즐거우니까 한다. 매일매일 시간이 너무 빠르고, 좀 더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 잠을 자는 시간도,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도, 멍 때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있다. 이 정도면 병인가 싶다가도,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쩌란 말이야. 하고 이내 체념한다. 즐거우면 됐다.

 

 

 

 

 

성실히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고 또 소리도 내본다. 입으로든, 성대로든, 손가락으로든, 그게 어떤 방식이든. 72.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기 위해 더듬거리는 그 손을 지지한다. 나는 또 피아노를 뚱땅거릴 예정이다. 피아노를 왜 배우냐는 말에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다.

 

 

 

 

덧1. 이 책은 정말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까지도 열정적이다. 너무 재미있다. 계속 찾아 읽게 된다.

덧2. 현을 해머로 때리는 힘으로 소리가 난다. (<양과 강철의 숲>을 다시 읽어야 하나. 읽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덧3. 나도 외워본다. 발렌느. (고래 : 프랑스어로 발렌느 (Baleine))

 

 

 

오탈자 41. 이론 적인 부분은 금방 이해를 하고 따라오거든요 ▶ 이론적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