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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공장
엘리자베스 맥닐 지음, 박설영 옮김 / B612 / 2020년 6월
평점 :
지금도 여성의 삶은 남성들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오래전 그녀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했던 억압과 구속은 지금 내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든지 간에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림이 그리고 싶었을 뿐이었던 아이리스는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와 같이 취급되는 모델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기가 막힌 현실을 배경으로 막이 오른다.
유리병 안에 갇힌 여인과 박제된 듯한 다양한 생명들을 그리고 있는 표지가 아이리스의 험난한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정해진 삶과 정숙함을 이유로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투명한 유리병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삶을 말이다.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소한 질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기약하는 두 자매 아이리스와 로즈는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로즈가 병에 걸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잃기 전까지 말이다.
병적으로 아이리스에게 집착하는 로즈, 그런 로즈를 사랑하면서도 로즈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이리스. 그녀들은 런던의 지저분한 골목 한편에 위치한 아편에 찌든 설터 부인의 인형 가게에서 1년 내내 인형 옷을 만드는 일과 도자기 인형 얼굴에 눈동자를 그리는 일을 하며 근근이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병으로 험한 얼굴을 갖게 된 로즈는 아이리스가 그녀를 두고 떠날 것 같은 두려움에 그녀에게 정숙을 강요하며 그녀가 바라는 화가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아이리스는 벽날로 위에 노힌, 반질거리며 윤이 나는 스페니얼 도자기 인형을 바라봤다. 상류층 집안의 장식품을 흉내 내다 만 싸구려 인형이었다. 한심하게도 그들이 속하지 않은 계층의 관행과 윤리를 따르려고 애쓰는, 부모님을 똑 닮은 물건이었다." (p.74)
설터 부인과 로즈의 부단한 방해에도 아이리스는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던 중, PRB(라파엘전파형제회)의 회원 루이로부터 모델 제안을 받게 되고, 아이리스는 그림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창녀 취급을 감수한 채 모델 일을 수락하게 된다.
지저분하고 어두운 런던 골목의 스산한 분위기를 한껏 깊게 만드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집착과 광기로 똘똘 뭉친 박제상 사일러스다. 그는 화가들에게 동물 사체를 박제한 정물을 팔며 자신만의 전시관을 꿈꾸고 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기괴한 모양의 동물 사체를 광적으로 모으며, 한번 마음에 품은 그 무엇도 포기하기 않는다. 광기어린 사일러스의 눈에 띄 아이리스, 그녀는 무사히 인형 가게를 탈출하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벽지 곰팡이 아래에도, 설탕 냄새 아래에도 배어 있었다. 그건 실의였다. 공기가 실의의 냄새로 시큼했다." (p.350)
"아이리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비둘기.
접착제로 붙인 날개.
아이리스야말로 새장에 갇힌 새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나무 빗장을 부러뜨려줄 아이는 없었다." (p.520)
음산한 런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여성에 대한 핍박과 신분차별에 대한 갈등과 집착으로 1850년대의 시대상을 그려나간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사랑, 사랑을 가장한 애증, 집착, 광기 그리고 살기까지 다양한 감정들을 맛깔나게 버무려 놓은 글이다. 다만, 열심히 달려가던 글이 툭 끊기는 것처럼 마무리되는 점은 살짝 아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