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담백한 문체를 좋아한다. 깊이 없이, 시간의 공백을 메우듯 책을 읽지만 유난히 잘 읽히는 글이 있다. 나에게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그런 사람이다. 자국을 깊게 남기는 메시지를 준다거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주지는 않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담담히 흐르는 풍경소리와 같은 고즈넉함이 있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30여 년간 에쿠니 가오리가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발표한 짧은 글들을 모아 세 가지 챕터로 구성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작가로부터 시작해 전업 작가가 되기까지 쓰는 사람으로서의 목소리를 담아낸 첫 번째 챕터 쓰기, 잠시 잠깐의 짬이라도 읽기를 멈추지 않는, 그래서 책 속의 삶에 더 충실한 듯 보이는 읽는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을 담은 두 번째 챕터 읽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창작자로서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 마지막 챕터 '그 주변'으로 나눠 작가이기도 독자이기도 창작자이기도 한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엿보게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도피인 동시에, 혼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연습이기도 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 사물을 보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의, 간단한 연습이기도 했다." (p.101)

소소한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 그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 세계에 머물고 있다가 잠깐 현실로 마중을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글 속에 그 속에 한동안 머물다 잠깐 밖으로 나오고 싶은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투영된다. 긴 시간 목욕을 하고, 늘 먹는 과일을 먹으며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본다. 일상의 행복과 평화가 오롯이 전달된다.

"아무튼 온 세계의 사소한 것들을,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신이 온몸으로 주워 모았다는 겁니다." (p.17)

추억을 간직하듯 닿아서 작아진 지우개들을 모으고, 그 작은 지우개들이 운동회를 하듯 우당탕 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모와 중년을 훌쩍 넘긴 두 자매, 세 모녀의 새해맞이 또한 유쾌하다.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칠 수도 있는 모습을 중년 여성의 당당함으로 여기고 그녀들의 하루를, 그녀들의 해넘이와 해맞이를 부러운 듯 그려낸다.

"좋은 하루였네.

좋은 1년이었네.

내년에도 즐겁게 살자." (p.80)

조각조각 짧은 글들이 소녀스러운 감성으로 이끈다. 어쩌면 나도 한동안 글 속에서 헤어 나오기 싫어 질지도 모르겠다.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을 이야기로 채우고, 햇빛으로 장식한다. 그녀의 비밀일기장을 엿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 옆에 앉은 나에게 속삭이는듯하다. 자박자박 걷는 것 같은 시간이 채워진다. 한동안 머무는 이곳에 말이다. 소박하고 예쁜 글들과 조우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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