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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한해 동안 한국에 나오는 단편소설은 얼마나 될까. 어쩐지 그것도 꽤 많을 것 같다. 문예지뿐 아니라 회사에서 내는 책이나 잡지에도 단편소설이 실릴 테니 말이다(회사에서 만드는 건 단편소설 싣지 않을까). 그 가운데서 내가 만나는 건 아주 적다. 아니 작가가 단편소설을 썼을 때는 거의 못 본다. 챙겨보는 문예지가 없어서. 여러 문예지나 잡지에 실린 단편에서 빛을 보는 건 얼마나 될까.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라면 언젠가 그 소설가 소설집에 실려서 더 많은 사람이 만나기도 하겠지. 그렇게 단편소설을 만날 때도 있기는 하다. 예전에 한국 단편소설을 보다 한동안 안 보다 몇해 전부터 가끔 보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또 이 말이구나. 단편소설은 어떻게 보면 가장 좋을까. 마음에 드는 건 여러 번 보고 작가가 하는 말을 좀더 알아들으려 하면 괜찮을까. 이것도 생각만 하고 실제 한 적은 없다.
젊은작가상은 올해로 아홉번째를 맞았다. 내가 보기 시작한 건 여섯번째부터다. 네해나 만났다. 한국 단편소설 다시 보게 된 것도 그 정도 됐을까. 문학상을 받은 소설집은 이것밖에 안 보다(기회가 오면 다른 것을 보기도). 예전에는 이상문학상 받은 걸 봤는데. 여기에는 한해 동안 젊은 작가가 쓴 단편소설에서 고른 일곱 편이 담겼다. 일곱 편이라니, 무지개 색이네 했다(실제 무지개 색은 더 많다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이번만 일곱 편이 실린 건 아닌데. 앞으로도 일곱 편만 실을까. 한편 더 넣고 싶을 때는 없을까. 좀 쓸데없는 생각을. 올해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에서 임현은 지난번에 대상을 받아서 알았지만, 다른 사람은 거의 처음 알았다. 임현 소설도 지난해 상 받은 거 <고두>밖에 안 봤구나. 어쨌든 이 책을 보고 이런 소설가가 있다는 걸 알아도 괜찮겠다. 한편만 보고 그 작가가 쓰는 소설이 괜찮은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한편만 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어떤 소설을 보고 그 소설가한테 관심을 갖고 소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부럽다. 아니 나도 아주 없는 건 아닌가.
소설을 봤으면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단편소설은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상을 받은 박민정 소설 <세실, 주희> 해설을 보면 미국 뉴올리언스에 간 주희와 일본 사람으로 동방신기 유노윤호를 좋아하고 한국에 와서 일하는 세실이 비슷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지 난 잘 모르겠다. 모르면서 그곳에 녹아들려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한 걸까. 주희는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불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걸 잘 몰랐다. 세실은 증조외할머니를 전쟁영웅이라 했는데, 한국 처지에서 보면 세실 증조외할머니는 전쟁영웅이 아니다. 일본에는 세실 같은 사람이 더 많겠지. 주희는 일본에서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에는 오래전에 전쟁에 도움을 준 곳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다. 세실은 유노윤호 고향인 광주에 가고 싶다는 말도 한다. 한국 사람한테 광주는 좀 다른데. 한국사람이 오키나와를 놀러갈 바다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 오키나와가 미군 때문에 힘들었던 것과 한국이 일본 때문에 힘들었던 건 다르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 역사뿐 아니라 다른 나라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면 다른 생각으로 여러 나라에 가지 않을까 싶다.
지금 사람은 그림으로 돈을 벌려고도 한다. 예술은 돈과 상관없이 순수하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그래도 그걸 하는 사람은 돈보다 다른 걸 생각하겠지. 돈을 가진 사람이나 돈을 만지는 사람이 예술에 돈을 끌어들였구나. 임성순 소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은 화가와 돈을 가진 사람을 이어주던 사람이 잘 안 되고, 다른 식으로 해 보려 하지만 여전히 돈을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곳에 가고 죽게 생겼다. 뒤에서 조금 무서운 소설이 되다니. 지금 생각하니 이런 소설 처음은 아닌 듯하다. 그게 뜻하는 게 뭔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만 보고 그냥 무섭다 생각하고 싶은데. 임현 소설 <그들의 이해관계>는 사고를 당한 사람과 우연히 사고를 피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아주 짧은 시간 차이로 누군가는 사고를 당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피하기도 한다. 자신이 사고를 피했다고 다행이다 생각해도 괜찮을까. 사는 거 쉽지 않구나.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그 양은 정해져 있다는 말도 있는데, 어쩐지 그 말 무언가를 숨기려는 거짓말 같다. 사람마다 느끼는 행복과 불행은 다르기도 하다. ‘나’가 아내가 죽기 전에 아내 말을 잘 들었다면 좋았을걸. 사람은 지나고 나서 아쉬워한다.
요즘은 사람한테 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도 잘 모르겠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기계로 살려두는 건 나도 반대다. 하지만 별일 없는 사람이 죽겠다고 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인간적인 말><정양수>에서 ‘나’의 이모는 왜 그때 죽으려고 한 건지. 사람답게 죽겠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도 죽으면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텐데 하는 생각 가끔 한다. ‘나’의 이모는 이런 것도 아닐 거다. 그때 죽기로 한 건 ‘나’의 이모밖에 모르겠다. 이모가 죽고 ‘나’와 아내 해원은 그 이야기를 할까. 김세희 소설 <가만한 나날>을 보고 새로 나온 물건을 쓰고 블로그에 후기 쓰는 게 광고일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난 인터넷에서 보는 사람은 다 글과 같겠지 생각한다. 이것저것 많이 안 보고 지금까지 내가 거짓으로 글을 쓴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겠다. 그건 참 다행이다. 자신이 써 본 적도 없고 문제가 있을지도 모를 물건을 알리면 그렇게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건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는 게 낫겠다. 물건 광고하는 일이 안 좋은 건 아니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제대로 말하고 사과하면 좋겠다. <한밤의 손님들>(최정나)은 잘 모르겠다. 그림을 보고 쓴 소설이라는데 연극 같은 느낌도 든다. 지긋지긋한 식구 이야기기도 할지.
마지막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박상영)는 제목이 참 길기도 하다(임성순 소설도 제목 길지만). 지난해에 나온 젊은작가상 작품집 마지막에도 제목이 긴 소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천희란)가 실렸는데. 공통점도 있다. 동성애자가 나온다는 거.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다를까.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소설을 보다가 두 사람이 여자 이름이거나 남자 이름이면 동성이구나 한다.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잘 모를 거다. 영상은 보는 거니 바로 알겠지만. 동성애자를 다룬 영상은 거의 못 봤지만, 좀 지나치게 나타낼 때가 더 많지 않나 싶다. 여자 남자도 사람이고 동성애자 이성애자도 그저 사람이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