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런 그대의 삶은 그대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그대가 아는 사람은 물론이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사람에게까지 반드시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미칠 것이다.
나오미, 룻, 보아스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자들을통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움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진 그들이 역사의 지평을 뒤흔든 생명용품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 비움과 생명용품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 P42
지금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참으로 암울할 뿐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 등 어느 분야 하나 부패하지 않은 곳이없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야말로 총체적 부패요, 가히 부패공화국이다. 그래도 그대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혹 그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 세상이 진흙탕인데 나혼자 진리를 따른다고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맑은 물한 방울이 된다 한들 이 진흙탕 세상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그대의 말이 맞다. 그대 홀로 진리를 따른들 당장은 아무 소용없어 보일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진리를 외친들 세상은 미동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에게 상대적인 불이익이 돌아오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먼 시선을 지녀라! 300년 후를 내다보라! 그대 한 사람이라도 진리의 씨앗을 뿌리기만 하면, 300년 후 대한민국은 반드시 새로워질 것이다. 그대라도 맑은 물 한 방울이 되기만 하면, 그대로 인해 진흙탕 대한민국은 300년 후에 기필코 소생할 것이다. 진흙탕으로 스며든 물 한 방울이 도리어 진흙탕에 동화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맑은 물 한 방울이 진흙탕 전체를정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요 오병이어의 법칙이다.
예절이란 상대에 대한 자기 지키기다. 상대를 업신여기려는 자신을 억제하고, 상대가 너무 좋아 도를 지나지려는 자신을 절제하는 것으로부터 ‘일상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모든 예의와 절차가 지켜진다. 예절이 공생의 건실한 토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 P92
크리스천에겐 자신이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있는지간단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의 기도 속에 몇 사람이나 포함되어 있는지를 따져 보면 된다. 기도는 노동이다. 기도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노동과 같은 기도 시간에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대부분의 기도는 자기 자신, 자기 가정의 울타리를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도 속에 매일 등장하는 타인, 바로 그 사람만 진정 자신이 마음으로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대의 기도 속에 몇 사람이나 등장하고 있는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이것이 크리스천들이 좋아하는 빌립보서 4장 13절의 직전 구절인 11절에서 12절의 내용이다. 바울은 경제적으로 풍부할 때도 있었고 말할 수 없이 궁핍할 때도 있었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든 교만이나 비굴에 빠짐 없이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신을 적응하는능력을 길렀다. 바로 이것이 빌립보서 4장 13절의 배경이다.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의 믿음이란 공허한 말놀이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P113
홀로 서려 하지 않는 공생인은 평생 기생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더불어 살려 하지 않는 자립인은 사람을 해치는 유아독존이게마련이다. 이것이 자립과 공생의 수틀인 다윗을 하나님께서 쓰신 까닭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이 자립과 공생인 이유이다. 성경에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한결같이 자립과 공생의 사람들인 까닭 역시 여기에 있다.
그대 청년아! 우리 사회가 분열됨을 가슴 아파하지만 말아라. 남의 탓을 하지도 말아라. 그대가 이 시대의 다윗이 되어라. 그대의 중심을 자립과 공생의 교직판이 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자립과 공생의 수틀로하나님께 드리라.
바로 이것이 웃사가 즉사하는 현장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직접 목격했던 다윗의 깨달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들을 신봉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은 곳에 거하려는 인간을 반드시 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 위해서는 늘, 자기 손으로 하나님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것들을 자발적으로 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현장을 ‘베레스 웃사‘ 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이제부터 자신의 우상인 ‘웃사‘ 즉 자기 욕망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거하도록 자발적으로 ‘베레스‘ (치다) 하겠다는 결단의 고백이었다. 그 길만이 자기 욕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는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고, 또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000년 전의 이 청년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으며, 특정 인간일 수도 있고, 자신의 힘과 능력일 수도 있다. 우리는그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기 위해,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섬긴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온갖 열심을 다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을 다한들 부족한 한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보다 그것을더 신봉하려는 자기 자신을 ‘베레스 웃사‘ 하는 것이다. 부자 청년을 향한 주님의 ‘베레스 웃사‘ 요구는 바로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다. 자발적인 ‘베레스 웃사‘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지켰다는 자기 착각 속에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주님을 포기해 버린 어리석은 청년이 될 뿐이다.
사람마다 출생 환경과 성장 배경이 다르다. 그대가 부잣집에서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을 수도 있고,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자랐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 의지 밖의 문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그대의 의지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대가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일평생 나폴레옹처럼 자기 욕망의 우상을 좇아 사람을짓밟으며 살 수도 있고, 인생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으로 일평생가난한 자들의 이웃으로 살 수도 있다. 그대가 부잣집 자식이기에일생토록 주지육림에 빠져 사는 오렌지족이 될 수도 있고, 처칠처럼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들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살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의 주체는 그대 의지다. 그대가 어떤 배경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 속에서 성장했건, 일평생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대의 의지를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대의 의지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이란 삶인데, 의지가 결여된 믿음이란 태양 앞의 얼음덩이와 같아서 바른 삶으로 이어질 도리가 없다.
언젠가는 그대의 코끝에서도 호흡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시체는 산 사람에 의해 장사 지내질 것이고, 그것으로 그대의 시대는막을 내린다. 그대는 퇴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그대는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대를 알고 있는 모든자들, 그대와 관련을 맺었던 모든 자들에게 그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허망한 야망의 노예였는지 아니면 진리의 사람이었는지, 그대 스스로 밝히게 될 것이다. 퇴장은 등장이며, 죽음의 퇴장 후에이루어지는 등장에 더 이상 퇴장이 없다. 퇴장의 질과 수준이, 곧새로운 등장의 질과 수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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