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의 위로
조안나 지음 / 지금이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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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하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일 거예요.
(...)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p 6 프롤로그 - 모든 것이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께서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던 것. 나지막히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가 좋았던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느라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오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나도 책을 읽었다. 어린 동생을 까불락거리며 할아버지의 셔츠를 타고 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비교적 얌전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는 책을 읽는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되어서 부모님은 나를 위해 도서관에서, 헌책방에서, 책을 엄청나게 가져다 주셨다. 그 덕에 초등학생일 때부터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지금 시력이 안 좋은 것은 그 때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전에도,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도 책을 읽어서 혼도 많이 났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글을 쓰기도 했다. 다독, 다작, 다상량이 글을 잘 쓰기 위한 조건이라는 데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좌절시키는 모든 것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p 73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고 싶을 때 -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성인이 되어서는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거나 고전들을 읽는 것이 좋았다. 특히 민음사 시리즈는 어서 큰 집을 가지고 괜찮은 서재를 꼭 만들고픈 이유가 되었다. 사강의 책은 민음사에서 내지 않았지만, <슬픔이여 안녕>을 읽은 후로 좋아하는 작가다. 그녀는 이유도 모르고 내게 머물러 있던 우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다. 19세의 나이에 걸출한 명작을 냈다는 사실이 내심 질투가 나지만, 그녀가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대화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을 정도다. <책장의 위로>를 쓴 작가도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강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생을 살았지만, 한 번쯤 일탈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강의 말마따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을 달랠 곳을 찾아 헤매는 도시인들에게 그의 소설은 깊은 위안이 된다.
'아, 나만 이렇게 외로운 게 아니었구나!'
그의 소설대로라면 혼자 술을 먹어도 사연 있어 보이고, 혼자 수업을 듣더라도 구차하지 않으며, 혼자 살아도 '이유 있어' 보인다.
p 99 새벽에 홀로 깨어 있고 싶을 때 -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그야말로 새벽을 위한 책을 꼽을 때 나는 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말했다. 원래는 일본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 크나큰 충격을 추었던 책이다. 하루키는 이렇다할 메시지를 주는 것도, 수려하고 화려한 문체를 쓰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글을 쓴다. 사람이 외로울 때, 외로운 것이 외로울 때에 나는 잠에 들기 위해서 그의 책을 읽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에서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일본 문학 특유의 정갈함과 적당한 쓸쓸함을 사랑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책장의 위로>에서 저자는 하루키가 프랜차이즈 가게들을 잘 표현한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보면 그가 자주 가는 가게들이 무척 부럽다. 어딘가 세련되면서도 또 동시에 수더분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키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 주인공을 내세워 혼자 있어도 그다지 초라할 일도 없다는 말을 건네는데, 그 덕에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혼자 영화도 잘 보고 혼자 카페에서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혼자 밥도 잘 먹는다.

 


갈수록 책보다 즐길 거리가 많아졌지만, 책이 내게 주는 기쁨처럼 잔잔하고 편안하고 지속적인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p 221 에필로그 - 별것 아닌 나와의 화해


요즘은 나부터도 책을 잘 안 읽는다. 특히 회사를 잠깐 다니는 동안은 더했다. 두 시간의 통근을 핑계로 집에 오면 무작정 누워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상들을 보며 웃기 바빴다. 그럼에도 정말 우울하고 힘이 드는 날은 늘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어떤 것도 나를 그토록 포근히 안아주지 못하니까. 책을 좋아하는 나의 국문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 참 책들을 안 읽는다. 못 읽게하는 부모들의 상황도, 책을 읽기에는 눈치보이는 학생들도 안쓰럽다. 책을 공부처럼, 의무처럼 읽게 해서는 안 되는데. 어린 시절에는 미리 공부를 시키느라 못 읽게 하고 커서는 습관이 안 되어서 못 읽는다. 우리에게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가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든 도망치든 한다. 자꾸 곪으니까 아픈 거다. 어떤 방법이든 포근히 안아줄 곳을 찾아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책일 뿐이다. <책장의 위로>라는 제목대로, 그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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