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 1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그 여자는 붉은 피가 제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았다. 이제 자신은 아주 작고 가볍게 될 거라는 상상을 했다.
p 28

 

 

공지영 작가의 책은 <도가니> 이후로 처음이다. <도가니>를 읽으며 펑펑 운 기억이 있어서 왠지 공지영 작가의 책은 잘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도 태연하게 (그런 듯한 필체로)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것 같다. 잘 피해왔는데 우연치 않은 기회에 그녀의 신작을 접할 기회가 생겨 읽게 되었다.

<착한 여자>는 주인공 정인이 자살기도를 하는 듯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자살기도를 해?라는, 다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더 고통스러우면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고통스러운 순간은 온다. 서로 사랑할 때보다, 자신의 사랑이 더 크다는 박탈감을 느끼면 인간은 으레 괴로워진다. 버림받게 되거나, 그것을 예감하는 순간이 올 때 특히 더.

 

 

 

 

이를테면 사랑은 그렇게 온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날마다 바라보던 그 낯익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흐린 아침, 가까운 산이 부드러운 회색 구름에 휩싸이고 그 낯익은 풍경이 어쩐지 살아 있었던 날들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할 때, 그때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을 한 타인의 영상이 불쑥 자신의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낌이 하도 홀연해서 머리를 작게 흔들어야 그 영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그때.
p 141

 

 

이 책은 분명 정인의 인생을 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사랑의 일대기처럼 느껴졌다. 정인의 부모님도, 명수의 부모님도, 현준도, 명수도, 모두가 (결과가 어떻든) 사랑을 했다고. 사람에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이 야속하다. 우리가 이 생에서 얻은 교훈으로 다음 생을 살 수 있다면 아마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텐데. 우리는 적어도 각자 인생에서 금기 하나 정도는 배워가며 살지 않는가.

어느덧 이십 대 중반이 된 입장에서 정인의 어린 시절을 보는 심정은, 일 년쯤 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었을 때와 비슷했다. 저 어린 것이 뭘 안다고,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정인의 어머니가 저수지로 달려간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린 정인에게 원망을 돌리는 것은 공연히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절망적이었어도 눈빛 단 한 번만이라도 던져주지. 정인은 그것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갔을 것이다. 정인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과 정관의 폭력으로 버물러진 어린 시절을 보내고 편찮으신 할머니를 돌보는 효심 지극한 처녀로 자란다. 언니 정희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정인이 가여웠다. 아마도 그래서 난데없이 나타난 현준이 그녀에게는 강렬한 유혹이자 도피처로 느껴졌을 것이다.

정인이 현준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어찌나 안타깝던지. 그녀가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불보듯 뻔했다. 정인과 마찬가지로 현준 또한 사랑을 배울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줄 수 없고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다 한들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준은, 정인이 응당 받아야하고 받아야만 하는 깊이의 사랑을 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정인의 먼 발치에서 빙빙 맴돌기만 하는 명수가 짜증날 정도로 답답했다.

시대적 상황과 그 시절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야 할테지만 참, 사랑하기 팍팍한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자에게는 조심함이 강요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만나도 오히려 능력자처럼 여겨지던 분위기가 남아있었으니. 물론 사랑이란 모두가 다르게 정의하는 것이기에 무어라 꼬집을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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