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안전가옥 오리지널 24
민지형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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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생각한다. 도저히 부끄러운 과거의 일들을, 절대로 흘려보낼 수 없는 상처들을 잊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망각을 선택할까? 가끔은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고민의 끝에서는 결국 내가 잊고 싶어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재이'라는 여성이 있다. 그는 부잣집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여러 불편한 상황들도 초연하게 넘기는 노련한 사람이다. 어느 날 그가 일하는 집의 사장이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라는 기계를 사 온다. 사장과 함께 광고를 봤기에 그것의 가격과 정체를 알고 있는 재이는 사장이 인생의 어떤 부분을 돌이켜보고 싶은지 궁금하다. 재이는 젊은 20대 여성이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위협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들이 보기보다는 똑똑하므로, 재이는 주인집의 비밀을 찾아내는 일을 즐긴다. 어느 날 재이는 기회를 노려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 기록을 찾아보는데, 이후 사장이 출장을 가게 되자 어딘가 이상한 사모의 행동을 보게 된다. 사모 또한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재이는 그의 기록도 살펴보고, 그 이후 재이는 점점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처음부터 재이라는 캐릭터에게 왠지 모를 매력을 느껴 빠져들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결말까지 망설임 없이 달려가게 됐다. 낯설면서도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소재가 등장하더니만 지극히 현실적인 흐름이 보였다. 언제나 선량한 의도로 만든 기술의 발전은 누군가의 손을 타며 변질된다. '라이프 랜드스케이프' 또한 그랬다. 다크웹을 통해 성범죄자들의 기억이 비싼 값에 팔리면서 피해자들은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냥 영상을 넘어 감각까지 공유된다고?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일 테다.

재이로 인해 변화하는 리사라는 캐릭터 또한 매력적이면서도 답답했다. 그는 호라이즌이라는 기업의 뒤를 잇고 싶어하는 딸이다. 가정폭력과 무시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기업의 대표 자리에 앉고 싶다. 그래서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발명했고, 아버지 노아의 부당한 요구도 전부 이행했다. 그런 리사에게 유일한 오점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재이였다. 리사를 보기 좋게 속여 넘긴 재이는 어느 날 다시 리사 앞에 나타나고, 리사는 결국 무너진다. 재이 또한 리사를 위해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변한 것이다. 그들이 변하게 된 변곡점이 무엇이었는지, 실은 그게 중요하다.

재이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가 있다. 툴툴대면서도 결국 재이가 위험해질 때면 반드시 달려오는 시안. 리사는 그런 둘의 관계에 생전 처음 호기심을 느끼고, 신기해한다. 가족에게조차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도통 믿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현실의 고달픔 때문에 온갖 불합리를 무던하게 넘기게 된 재이가, 감정을 거세당한 듯 허망한 목표를 쥐려 달리는 리사가, 어떻게든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을 돕고자 동분서주하는 시안이, 텅 빈 눈으로 재이를 보다가 사라져 버리던 나리가, 전부 내 주위에 살아 숨쉬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들은 내 곁에서 숨을 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차마 알지 못했을 뿐.

리사가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심히 안도했다. 작품 속 여성들이 한없이 약하면서도 또 한없이 강해져서 다행이었다. 망가지는 대신 망가트리는 선택을 해서 다행이었다. 단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했다. 망가지느니, 망가트려야지.

책을 덮은 순간 책의 제목이 달리 보였다.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남긴다. 망각하지 마라. 반드시 기억하되, 힘없이 무너지지 마라.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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