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윤슬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작년 말, 한 해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파주로 떠났다. 터무니없이 조용하고 대책없이 날카로운 겨울 바람을 뚫고 뜨거운 커피를 사서 숙소로 되돌아온 시간이 새벽 4시. 다들 각자의 애인이나 가족과 함께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쪽잠을 잔 것이 모두가 나른하게 잠든 시간에 깨어나게 만들었다. 온 세상이 잠들고 혼자만 오롯하게 깨어 있는 것 같은 밤. 그 짙은 침묵 안에서 나는 혼곤하리만치 안온했다. 책을 읽다 새로운 해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펼쳐든 책이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이었다. 올해의 첫 책으로 고른 게 의아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전자책으로 읽다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미완의 기억이 그 책을 집어들게끔 했다.

박완서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고, 그나마도 어릴 때 교과서를 통해 읽거나 그 나이대 권장 도서여서 읽거나였다. 무엇보다도, 수더분하고 소탈한 그의 문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취향이 변한다더니 이제는 그의 감성이 퍽 와 닿고 마음이 진종일 시릴 때도 있다.

나 또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서(혹은 그런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으면서) 내 솔직한 이야기를 쓰는 일에 버릇을 들였는데 그 중 제일 가는 부끄러운 글이 다름 아닌 에세이다. 오히려 일기는 혼자 보는 거라 부끄럽지 않건만 에세이는 불특정 다수에게 보일 것을 감안하고 쓰는 연유에서인지 아주 부끄럽다.






그런 연유로 나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을 때 유독 낯을 가린다. 이렇게 내밀하게 마주해도 될까? 하며 책장을 설렁설렁 넘겨보게 된다. 그러나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하다가 보니, 이제는 제법 에세이를 읽는 일에도 맛을 들였다.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 보니 또 치기 어린 열등감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꾸준하게 밟아 온 길을, 나는 잽싼 달음박질로 넘겨짚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사랑'이 듬뿍 담긴 글을 읽은 기분이었다. 부모 혹은 조부모의 세대의 말이라면 늘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부채감이 남을 것을 비장하게 결심하고 책장을 넘겼는데 되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애정'이 서술된 문단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약간의 해방감, 또 아주 많은 경외감. 많은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사람에게서 느끼는 일종의 건강함. 내가 언젠가는 꼭 갖고 싶은 미지의 무언가.

그는 아주 솔직하다. 스스로가 작고 우습게 여겨지는 부끄러운 순간마저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스스로를 반성하는 글을 읽으며 나 또한 그런 적 없나? 당연히 있겠지, 그걸 솔직하게 글로 풀어낼 수 있나? ...... 등의 자문자답을 했다. 에세이의 매력이란 역시, 생활 밀착형의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에서 문득 작고 커다란 무언가를 느끼는 것일 테다.

또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책 답지 않게 활자가 크고, 문장 간 거리가 여유로워 읽기에 용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사이즈와 디자인의 책들에 적응돼 '읽기 어렵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했는데 이 책은 불현 듯 '읽기가 참 쉽네?' 했다.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의 문장들이 느른하게 머릿속을 거닌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 또한 이런 글을 쓰는 이런 어른이 돼야지.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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