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리퍼 지음, 가시눈 그림 / 투영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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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관련 트리거 주의

나는 가끔 꿈을 꾼다. 대개는 깨고 나면 휘발되어버리는 유형의 것이지만, 또 어떤 것들은 눈을 뜨고도 연장되는 것처럼 생생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꿈 일기를 쓴다. 대부분 꿈 일기도 일상글처럼 공개 상태로 두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다. 작년 중순이었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어도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생생하고 긴 꿈을 꾸었다. 알람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멍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꿈이었다. 지인이 내게 약물을 몰래 먹여 성추행한 다음 학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내용이었다. 아주 간결하게 줄여보자면 그랬다. 나는 6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모멸감, 상실감, 공허감, 배신감, 수치심 등을 느꼈다.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의 가장 단단하고 뿌리깊은 곳을 흔든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숨게 했다. '그 일' 이후 꿈 속에서 일 주일이 더 흘렀는데 일 주일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결국 마주친 아는 언니에게 입에도 못 담을 욕을 들었다. 마치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채 그 욕을 듣다가 잠에서 깬 것이었다.

눈을 뜨고 내가 꿈 속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 현실의 나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알았다. 나는 결코 이 꿈의 감각을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간 내가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눈물짓던 것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하루 종일 멍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과 불편함을 견딜 용기가. 그리고 망설이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까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락함을 꿈꾸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을 향해 눈을 뜨지 않음으로써 한없이 비겁해지곤 한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도저히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기록기'를 읽으며 제야에게 일어난 일들이 물질화되어 내 살을 베어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 어린 아이에게... 나는 나를 베는 흉기를 빼앗아 가해자에게 들이대고 싶었다. 이 죄책감을 가장 무겁게 져야할 건 내가 아닌데. 그러다 '치유기'를 읽으며 회복을 위해 용기를 낸 제야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제야가 과거의 자신처럼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용기를 냈을 때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 우리가 하는 의미있는 행동은 결국 다음에 올 아이들에게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나는 어릴 때의 내가 그 쯤엔 어른일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했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진짜 어른은 언제쯤 될까, 이제는 딱 잘라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요즘 들어, 어른이란 내가 아닌 후대의 아이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어른으로 늙어갈 것이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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