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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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페인 문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해당 책을 책임 편집하신 지은님의 SNS를 보다가 관심이 생겨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책의 표지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던가? 우리나라 역사에도 해박하지 않아서 더더욱 다른 나라 역사에는 무지한 편이다. 당연히 스페인에서 군부 쿠데타로 내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는 것은 모르고 살았다. 이 책은 그 시기 예술의 샘이 멎었다시피할 적에, 내전 이후의 생생한 상황을 담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저자가 태어난지 100년이 된 올해, 새로운 표지로 단장해 재출간되었다.

어릴 때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대부분 자신의 작품에 반전의 메시지를 담았다. 극장에서 하울의 미모에 넋을 놓고 빠져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하울과 소피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전쟁이 멎어야만 했으므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 살면서도 전쟁은 내게 머나먼 이야기였다. 뉴스도 잘 안 보고 지내니까 어디선가 남북간 신경전이 벌어졌다고해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전쟁은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진저리칠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내내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 언저리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드레아가 그랬듯이. 안드레아가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바르셀로나의 외할머니댁은 그의 상상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어딘지 흉흉한 집의 모습은 물론이고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는 식구들을 보면서도 안드레아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답답함을 가방처럼 둘러메고도 이모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몰래 거리를 돌아다니고, 에나와 친구가 되어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과 현실이 늘 그러하듯 상황은 극으로 치닫게 된다. 에나에게 에상치 못한 애인이 생기면서 안드레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진짜 친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안드레아는 또다른 친구를 찾게 되어 마음을 달래보지만 쉽지 않다. 자신을 흠모하는 것이 분명한 폰스의 간절한 부탁에 태어나 처음, 부푼 마음으로 댄스 파티에 가지만 폰스는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나 한다. 그때 안드레아는 어마어마한 비탄을 느끼며 자신이 영원토록 주인공은 될 수 없고 관조자로서의 기능만을 가진 채 살아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느낀다. 어딘가 수동적이고 관찰자에 불과한 것 같은 안드레아를 쫓다 보면 사실은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안드레아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며 그럼에도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안드레아의 정신을 높이 사게 된다. 내가 그러한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토록 꿋꿋했을지 상상해보면서.

내내 음울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가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고함을 지르고 상대를 괴롭히고 주먹을 내지르고 가전 집기를 집어던지는 인간들을 보면 환멸이 들지만, 또 그 이면의 얼굴을 보면 인간은 입체적이라는 단순하고 당연한 명제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래서 그 속물적이고 야만적인 인간들을 결국 사랑하고야 마는 안드레아를 나 역시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씩은 고장나있는 인물들에게 점도가 높아 불쾌한 애정을 한 조각이나마 품게 된 채로 이 책은 끝이 났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단순한 애정도, 역설적인 애증도 아니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가장 본원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한 번도 인물들을 대변해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독자는 이들을 미워하다 또 이애하기를 반복한다. 그 일련의 과정이 결국 내 감정을 안드레아에게 동화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마냥 어지러운 이 때에 이 책을 읽게 된 것,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안드레아를 속속들이 알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그 일련의 '아무것도 없음'은 어쩌면 나를 앞으로 달려가게 해줄지도 모른다. 적어도 주저앉지는 않을 요량이다. 언제나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둔 채 새로운 세상으로 나서고 싶어하는 안드레아처럼.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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