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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기 좋은 방
신이현 지음 / &(앤드) / 2021년 5월
평점 :

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주인공 이금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가끔은 어딘가로 숨고 싶어진다. 이금과 달리 대단히 극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나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도망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태정이다. 이 책은 이금과 태정의 이야기, 또 그들의 사이에 혹은 주변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이 책은 1994년 작가의 데뷔작이었고, 결말을 달리 하여 재발간되었다. 단언컨대 촌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금은 고등학생 시절 수학 선생님이 나무의 소리를 듣는다는 말에 매료되었고, 그것은 이십 대 초반이 되어서도 그를 사로잡았다. 이금이 태정을 만나게 된 건 사소하고도 엄청난 사건 때문이었다. 이금은 택시에 실수로 회사 통장, 카드 등을 놓고 내리는 바람에 곤란해졌고 질책을 당하다 참지 못해 잘 다니던 은행을 뛰쳐나오게 된다. 정처없이 걷다 오동나무가 건실하게 위치한 여관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여관의 한 방, 테라스에서 무언가를 기름버너에 올리고 끓이는 태정을 만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도피를 시작한다.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끝도 없이 도망을 치는 태정의 방에 매료된 이금은 시간의 흐름 따위는 잊고 한참을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영혼이 닮아있다는 것을 안다. 마치 쌍둥이처럼, 데칼코마니처럼. 불현듯 탈출해버린 이금은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한 휘종의 도움을 받고 데이트를 하게 되어 엉겁결에 프로포즈까지 받게 된다. 이금은 지겨운 현실에서 도망치듯,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도피로 이번에는 휘종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수도 없이 가득 찬 고급 옷과 푹신한 침대, 맛있는 식사를 매끼 챙길 수 있는 집에 살지만 이금은 때때로 권태롭다. 이금은 계속해서 '숨어있기 좋은 방'을 갈망한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늙으면 어떤 얼굴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야위고 작은 담담한 표정의 늙은 남자.
이금과 태정은 서로의 닮은 점에 치를 떨며 또 사랑에 빠진다. 문득 이금은 태정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여지없이 그 생각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태정의 모습이다.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변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금은 기대하지 않는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나와 닮은 사람에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전에도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힘든 일일 것이다. 혹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서 편할까?
처음에는 이금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외로운 것도 권태로운 것도 알겠고 여러 환경이 몰아치는 것도 알겠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계속 읽다보니 그런 것조차 오만한 평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흘러가는 인생이 버겁고 버거워서 고여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정작 나부터도 툭하면 고여버리던 것이 떠올랐다. 더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한기까지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책장을 덮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 걷다보면 이금, 태정과 스쳐갈 것만 같은 기분. 두 사람이 다정히 손을 잡고 걷던 어느 날의 뒷모습을 내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숨어있기 좋은 방을 찾는 이금은 그 방을 찾았을까? 사주를 볼 때마다 서른이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던 이금은, 사랑을 찾고 술술 풀리는 인생을 일궜을까? 그건 이 책을 읽어야 가닥을 잡을 수 있을 질문이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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