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곳에서 안전가옥 오리지널 7
이경희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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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일만큼 무서운 저주가 존재할까.

기억하는 일만큼 무거운 형벌이 존재할까.

p 229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표지가 참 파랗네, 였다. 바다인 것 같은데 또 묘한 일러스트라 한참 들여다보다 일단 책을 펼쳤다. 모두 읽고 나서 다시 본 표지는, 아 이래서! 싶은 느낌. 표지에 이 책의 내용을 응축해 놨다. 이 책에서는 '시간'을 '다이브'한다. '다이브'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바다를 떠오르게 하고, '시간을 다이브'한다는 건 왠지 전통적인 바다가 아닌 것이 떠오른다. 결론적으로, 무한히 나뉜 파란 원기둥 속으로 뛰어드는 일러스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원래 SF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데 안전가옥 출판사를 너무 좋아해서 읽게 된 책이다. 장르 소설이 어느덧 주류가 되는 것 같아 기쁘다.

<그날, 그곳에서>는 시간 여행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은 여성,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서로 얽키고 설키게 된 세 모녀의 이야기다. 가장 영향력이 강한, 큰 줄기의 사건은 부산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였다.




너는 마치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처럼 느껴졌어. 한없이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결코 닿을 수는 없는 그런 존재. 무한히 사랑하지만 온전히 사랑할수는 없는 사람.

...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내 삶을 한없이 유예시키는 너를.

p 290-291

원전 사고로 인해 급히 부산을 빠져나가야 했을 때 수아는 숙소로 돌아간 해미를 찾아 떠나고 해미는 수아와 다미를 찾아 지하철역에 온다. 결국 두 사람은 엇갈리고 해미는 다미라도 살리기 위해 지하철에 탄다. 수아는 죽고, 남은 두 딸은 알아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해미는 그날부터 수아의 역할을 도맡는다. 다미는 매일같이 해미를 저주하며 또 동시에 그를 엄마처럼 의지한다. 해미는 그제야 수아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덧 멈춰버린 수아의 시간만큼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다이브'할 기회가 주어져 상황을 바꿀 기회가 생겼다.

사무실에서 한가할 때 읽다가 책 말미에 다다를 즈음 자꾸 눈물이 고여서 머쓱했다. 특히 수아가 해미에게 쓴 편지는 코끝이 시큰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였는데 그걸 살짝 엿본 느낌이었다. 나를 유예시키는 존재를 무한히 사랑하게 되는 것. 어릴 땐 내가 속해있는 가족에게서 빠져나와 새로운 가족을 자진해서 구성하는 것을 당연히 따르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끼리 품는 사랑은 특히나 더 다양한 형태를 띠는 것 같다. 뿌리깊은 증오를 보일 수도 있고(다미), 깊은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잃을 수도 있으며(해미) 사랑과 원망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느낄 수도 있다(수아).

오랜만에 내가 꾸리고 싶었던 가정을 생각했다. 어릴 때 막연히 꿈꾼 가족은 다정하고 듬직한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 마당이 있는 집, 그 집 마당에서 뛰어노는 강아지. 여전히 그 풍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혼자 꾸려나갈 미래가 더 기대되긴 한다. 주변에선 나이 먹고 외로울 거라고 하지만 그 안정감을 포기하는 대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삶을 한없이 유예시키는' 건 과거의 나로 족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했다. 온갖 시간과 사건이 얽혀 버린 가족들이 오해를 풀고 서로에게 다가서는 걸 보며 흐뭇했다. 자꾸 마음 한 구석이 피곤해지는 요즘이라 이런 따스함이 필요했는데, 바삐 달리느라 잊고 있었던 것을 되새기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SF라니, 어딘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느껴지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앞으론 SF장르도 조금은 좋아질 것만 같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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