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평점 :

작년 여름, 친구 J와 3박 4일의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면 꼭 책을 한 권 들고 가는 것이 나름의 전통(?)인데 작년 이맘때 나는 한창 전자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리디 셀렉트로 이 책 저 책 야금야금 읽다가 더운 날씨 탓이었는지 조선희 작가의 <아홉 소리나무가 물었다>라는 책에 푹 빠져 읽게 됐다. 겁이 많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달까. J가 보면서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이 책을 두세 쪽 읽고 내려놨다가 또 다시 얼마간 읽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 오싹해서... 겨우 이 책을 완독한 후, 나는 조선희 작가의 작품이 대개 한국 설화나 민담류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희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곧장 서평단 신청폼을 열었다. 인어라 함은 외국의 전설 속 괴물 세이렌과 그 결이 비슷한 존재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전통 요괴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에 첫장부터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그의 소설은 아주 큰 퍼즐의 조각을 여기저기 흩뿌려놓는 느낌으로 서술된다. 뭐지? 하면서 읽다가 어느 순간 한 발짝 물러나 보면 대강 윤곽이 잡혀 있는 식이다. 가령 <아홉 소리나무가 물었다>의 경우 이유 모를 공포에 휩싸여 있던 운전자가 갑자기 도로 한복판에 차를 두고 사라진다. <소금 비늘>에서는 순하의 어머니, 남정심을 이장하려다 그의 괴이한 모습에 놀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반에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정신없이 내용을 따라가느라 바빴는데 중반부부터는 섬세한 문장이 문득 마음을 치고 갔다. 가장 좋았던 인물을 고르라면 단연 순하. 그를 묘사하는 문장은 죄다 아름다웠고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되는 그의 모습, 눈빛, 말투 모두 다정했다. 나도 모르게 순하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 그 다음으로는 마리가 좋았다. 내 심장이 언젠가 네가 사줬던 찐빵처럼 말랑말랑해지며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슬픔일까. (p212) 감정을 묘사하는 것에 서툰 마리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설명한다. 어린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마리의 이야기는 더 곱씹어보게 하고, 울림을 준다. 그래서 순하와 마리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샜다. 마치 나도 함께 그들과 있는 것 같았다. 바다의 수압에 비하면 공기의 압력은 솜사탕처럼 가벼워요. 당신을 짓누르는 건 허무와 먼지이지요. (p320) 마리를 이해하고 다정하게 위로하는 순하를 보며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노곤해졌다.
누군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로 내 운명이 간섭받는 것은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p300) 또한 순하는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돌파해 바꾸고자 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요즘 나의 미래에 대해 틈만 나면 고민을 하던 나에게 순하의 태도는 큰 힘이 됐다. 내 운명이 간섭받는 일은 흔한데 시덥잖은 것에 흔들렸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우습도록 단순하게 여겨진다.
나는 명수暝水에서 왔느니라. 그곳에서 어떤 이는 등불이 되고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었지. 그리하여 나는 처음과 끝을 모두 보았노라. 또한 한 세상을 모두 보았노라. (p413) 광해군이 남겼다는 시조는 무슨 말인가 싶어 두어 번 반복해 읽어야 했지만 책을 덮을 즈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의 입장이 된 것 같았다. 허구의 세계지만 그 안에 속한 인물들을 보며 나는 등불도 보고 그림자도 느끼고 처음과 끝을, 그 과정을, 숨가쁘게 함께 달렸다. <소금 비늘>에서의 주된 소재는 백어. 백어의 비늘을 훔치게 되는 자는 자신이 누렸던 행운을 모두 빼앗긴다는 허무맹랑한 괴담에 불과할수도 있겠지만 나는 요상하게 책을 덮고서도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베지 말아야 하는 나무 같은 것이고 한 세계가 숨을 쉴 수 있는 숲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등불이 되어라, 스스로의 삶을 밝힐 등불로 무고한 것을 해치지 말라, 라는 당부는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판타지 소설도, 가물가물한 눈꺼풀에 차곡차곡 쌓이는 잠자리 동화도 좋아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만큼 내 자아 형성에 도움을 준 이야기도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마치 아이가 알기에는 길고 잔혹한 동화 속에서 막 빠져나온 기분을 느껴 반갑기도 했다. 가끔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읽어 보는 것도 심적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본 포스팅은 자음과 모음 공식 블로그를 통해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자음과모음 #네오픽션
#조선희 #소금비늘
#백어 #인어 #소설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