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허밍버드 클래식 M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윤도중 옮김 / 허밍버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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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야, 약속한다. 내 처신을 고쳐 가겠다. 운명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작은 불행을 지금까지는 항상 곱씹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 현재를 즐기고 과거는 지나간 것으로 돌려 버리겠다.

p8-9

베르테르는 어릴 때도 만난 적이 있는 청년이다. 초등학생 때 어린이 대상으로 출판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땐 이 사람 참.. 예민하네.. 하면서 (지가 그렇게 자랄 줄은 모르고) 꾸벅꾸벅 졸며 읽은 기억이 난다. 결말이 충격적이라 이 책 만큼은 어릴 때 읽었다는 사실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 이 궁핍한 생명도 끝이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알게 되지만 그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나에게는 베르테르가 그것을 알려준 인생 선배였다. 베르테르는 인간의 삶은 끝이 있으며 종종 누군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도 자진해서 끝맺음을 짓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 때 알았다. 결코 되돌릴 수 없고 슬픈 일은 이 세상의 건너편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허밍버드 출판사에서 새로 완역본이 나왔다기에 궁금했는데 받아본 책은 생각보다 얇고 조그마했다. 어릴 때 지루하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두께가 꽤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베르테르의 편지는 꽤나 적은 편이었다. 그는 가장 처음 수록된 편지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다시 힘을 내서 현재를 살아보겠다고. 아마 그의 우울증은 생각보다 오래, 지독했던 모양이다. 그는 과거를 계속 생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후회하고 그리워한 것이 틀림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과거를 꿈결처럼 걸으며 살 때 지독한 무력감과 우울감이 찾아온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며 눈은 가깝든 멀든 미래를 향해 고정되어 있어야 그냥 남들 사는 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 결국 과거가 아름다운 이유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아서 한동안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허우적대며 살았다. '그 때 참 좋았지'가 아니라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베르테르처럼 사랑에 온 마음을 바치는 편이라서 사랑이 끝날 때마다 속앓이를 하며 숱한 가정법을 사용했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5분이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듯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을 떠올리며 '만약'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짓는다. 비로소 내 캐비닛 속에 든 펜시브를 미련 없이 버리게 된 지금은 무척 평온하고 홀가분하다. 과거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할 때에만 떠올린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나도 취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를 사로잡은 격정은 광기와 별로 다르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 다 후회하지 않아. 왜냐하면 예로부터 뭔가 위대한 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 낸 비범한 인물 모두가 취한 사람, 미친 사람으로 매도되었다는 사실을 내 나름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지.

p82

베르테르는 어쩌면 인프피가 아닐까? 읽으면서 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프피라서 무척 공감되었기 때문에....는 mbti 과몰입자의 tmi..ㅎ 아무튼 중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베르테르는 이 시대에서 적응하기에 무척 고되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하위 귀족 정도인 것 같은데, 무척 중간의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고위 귀족들만 모이는 파티에서는 무시를 당하고 일반 백성들은 그를 귀하신 분이라고 부르며 어려워한다. 그나마 농촌에 지내며 만난 농부들과는 금세 어우러져 지냈지만, 베르테르는 도성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고위 귀족들을 경멸하게 된다. 이 사실만 봐도 신분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던 당시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도시에 가 일을 하기 전 시골에 머무를 때 로테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가 도시로 떠난 이유도 이 여인이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위해 어머니 역할을 도맡아하는 로테에게 사랑을 느낀 베르테르는 그에 대한 타오르는 마음을 절절하게 편지에 적는다. 매일같이 그를 보러 가 베르테르에게 달려드는 어린 동생들을 로테와 함께 안아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법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로테에게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하자 베르테르의 평온은 깨질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한다. 세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알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솔직히 이해 안 됨)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의견 차이로 인해 관계가 틀어진다. 이성적인 알베르트와 감성적인 베르테르의 창과 방패 급 대결은 결국 냉전으로 끝을 맺는데, 개인적으로는 베르테르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대화의 내용은 대개 베르테르의 공감 능력과 동정심을 알베르트가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비웃는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은 지능의 문제라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알베르트가 얄미웠다.

로테는 베르테르를 사랑했을까, 알베르트를 사랑했을까? 알베르트와 있을 때면 온유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고인이 된 어머니와의 추억도 공유할 수 있었다) 베르테르와 있을 때면 감정적 교류와 데일 듯 뜨거운 애정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로맨스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인 남주와 서브 남주의 치열한 대결구도 같은 느낌도 나고. 그렇게 생각하면 고전이지만 지금도 널리 읽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고전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를 충만감이 느껴진다. 단박에 읽히지 않는 글을 기어이 읽어냈다는 성취감과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이 반갑다. 이 때나 지금이나 사는 게 참 고민이구나, 싶고 뜻밖에도 먼 옛날의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다시 읽고 싶었고, 도서관 날짜에 맞추느라 미처 다 읽지 못한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 또 철학 서적이 읽고 싶었다. 삶의 의미를 너무 깊이 고민하다간 모든 것을 내려둔 채 베르테르같은 선택을 하고 싶어지지만 적당한 사유는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 머뭇거리는 걸음을 앞으로 내딛게 하는 밑거름이 되리라고 오늘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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