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p 96
파과.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흠집이 난 과실’이라고 한다. 조금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조각’이고, 과일을 가져다 붙이기에는 나이가 든 노년의 여성이기에. 하지만 책장을 덮은 후에야 어렵풋이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주인공 ‘조각’은 방역업자, 쉽게 말해 청부 살인업자다. 전자와 후자의 단어가 갭이 크다는 것은 알지만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개 나쁜 놈들을 처리하는 것이 업이니까 말이다. 아닐 때도 있지만.
그녀는 환갑을 넘긴 유일한 할머니 킬러라고나 할까. 친하지도 않은 새파란 후배는 그녀를 자극하고자 할머니라고 부르고, 처음 보는 젊은이들은 어머님이라고 부르기 일쑤다. 점점 늙어가고 둔해지는 몸이 불안하고, 이따금 일상적인 것을 깜빡하는 자신이 이제 퇴물인가 싶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하곤 했다.
그러던 그녀가 유일하다시피 드물게 실수를 했다. 그 과정에서 혼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늘 그녀를 치료해주는 장 박사를 찾아가지만, 흐릿한 그녀의 시야에 비친 것은 병원에 페이닥터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강 박사였다. 자신이 킬러라는 것을 알게 된 강을 조각은 협박하지만, 강은 이상한 사내였다. 알아서 순순히 모른척 하겠다고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목에 흉기가 들어온 상황에서도 조각의 상처를 걱정한다.
순간 조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강의 부모가 운영하는 과일가게에 찾아가기도 하고, 우연인 척 강에게 진료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강의 아이를 만난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본다. 말도 안되는 나이차이지만 아무래도 조각은 강에게 사랑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p 130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조각은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을 영위한다. 투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투우는 한창 잘 나가는 에이전시의 방역업자이자 조각의 한참 어린 후배이다. 건드려봐야 아무 이득도 없는 자신을, 간헐적으로 마주칠 때마다 건드리는 투우가 조각은 희한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p 292
투우는 점점 조각에게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녀의 일을 방해하더니 강의 가족에게까지 마수를 뻗친다. 조각은 자신의 감정을 간파하고 건드려오는 투우를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투우를 만나러 가는 날 조각이 우연히 만나 쭉 데리고 있던 강아지 무용이 숨을 거둔다.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류를 대신해 가족이었던 존재다. 조각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버린 무용의 시신을 보며 허망함을 느꼈다.
투우는 조각과 결투를 하며, 자신이 기억나지 않느냐 묻는다. 두 번째 질문이었다. 조각은 기억이 난다고 하지만, 투우는 아니라고 느꼈다. 조각의 눈빛이 불안했던 탓인가. 투우는 사실 조각이 원망스러운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왜 조각을 집요하게 쫓았을까. 대충 줘도 모를 약을 정성스럽게 빻아 건네던 모습 때문인가. 그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서인가. 그건 오롯이 투우만이 풀어나갈 감정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건 투우의 머릿속에 있는 조각은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중간 길이의 머리를 흩날리며, 방금 자신이 머리를 관통해 죽인 남자의 아들을 향해 ‘잊어버려’라고 말한 뒤 사라진 여자라는 것이다.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서 정성스레 빻고 세심하게 분류해 내밀었던 타인이라는 것이다.
이따금 사람의 인생은 기묘하게도, 순간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어이없이 짧은 영원들이 조금씩 모여 마지막에는 허탈할 정도로 목을 죄어오는 것이다. 나 또한 투우를 보면서, 조각을 보면서, 나를 장악하던 소소하기 그지없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그래서 완벽해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책만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