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p 49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로 구병모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몹시 오랜만이다. 특히 <아가미>의 경우 제목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읽어본 적은 없어서 리커버된 것이 반가웠다.
<아가미>는 초반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겨우 살지만 결코 죽을 생각이 없던 여자가 위험에 처하고, ‘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수께끼의 청년이 사람이 별로 없는 동네의 구멍가게 겸 민박집을 지키는 모습이 나온다. 인용된 본문은 곤의 독백으로, 그는 날짜에 대한 궁금증도 없이 그저 손에 집히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산다. 그냥 그저 읽을 뿐, 세상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습은 무척 무료하면서도 구미가 당겼다.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p 185
그저 비밀스럽기만 한 곤의 과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투숙객 덕분에 회상되었다. 지나치게 담담한데다 혼자이고 이렇다할 관광지도 아닌 곳에 머무르는 그녀를, 곤의 사장은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럼에도 곤은 왠지 그녀가 죽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여긴다.
사진을 찍으려는 것도 아니면서 그녀는 곤에게 동네 소개를 부탁한다. 결국은 산책이 된 안내는 둘이 더 많은 대화를 하게 해주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나서야 그녀는 곤에게 “강하를 알죠?”로 시작하는 본론을 꺼내어 들었다.
곤은 사실 일반적 의미의 사람이 아니며, 어떻게 본다면 돌연변이인 존재이다. 그는 아주 어릴 때 강하와 그의 할아버지의 손에 거두어졌다. 강하는 너다섯 살 많은 형아답게, 아직 어린 아이답게, 그를 챙기다가도 심술을 부리곤 했다. 물고기 새끼라며 욕을 하고 호수에 밀어넣다가도, 곤을 언젠가는 보내주려 돈을 모으기도 했다. 강하의 어머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법 평화로운 풍경으로, 곤의 맹목적인 애정과 강하의 애증이 그럭저럭 공생하는 편이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p 194
강하의 어머니는 배우를 꿈꾸다 이용만 당하고 갈 곳이 없어 고향에 돌아온 여자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에 지쳤고 유일한 위로는 아름다운 환각 뿐이다. 매일 정해진 시각에 알약을 삼키고 몽롱하게 누워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루의 일과였다.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 강하와 여자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애써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방치에 가까웠다. 그녀를 말없이 지키는 것은 곤 뿐이다. 손에 도통 잡히려 들지 않는 아름다운 물고기를 생각하며 또 약에 취했던 그녀는 어느 날 곤의 비늘을 본다.
그것은 그녀의 환각이 현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은 아름다움. 그날 곤은 태어나 처음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다. 늘 감추느라 전전긍긍한 삶이었으니 꽤나 달콤했을 것이었다. 곤과 그녀는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미적지근하고, 그냥 지나가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강렬했다. 극단적인 결핍을 겪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이니까, 아무래도 인용구에서 언급된 양가감정이 맞지 않을까 싶다. 사랑과 집착 사이 그 어딘가.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중략)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p 210
어떠한 감정이었든 곤과 강하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기어이 만나지는 못했다.
다만 곤은, 뜻조차 알지 못했던 제 이름이 사실은 강하가 지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의 뜻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경외였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존재에 대한 동경.
또한 곤이라는 물고기는 결국 떠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데, 강하가 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 두려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제나 다름없이 자랐다는 애정과 곁에 두고 싶은 집착이 한데 어우러져 강하는 곤을 그토록 밀어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양가감정은 이론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에게나 혼란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예전에 읽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아름답게 헤엄치는 곤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슬프면서도 아름다워서 책장을 덮기가 어찌나 아쉽던지. 우연한 기회에 아름다운 책을 접해 행복한 기분이었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책만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