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6 (무선) - 제3부 분단과 전쟁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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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거 결과는 대중들이 얼마나 제대정치를 원하고 있는가를 표현한 것임과 동시에 현정권에게 보내는 고지막 경고인 것이오. 현정권이 그 민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각성하지 못할 때 대중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때는 행동적 대중혁명을일으킬 일밖에 남지 않았소. 권력의 횡포와 부패가 시정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계속되었다간 대중들은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여당이나 한민당 계열의 공공연한 금품매수를물리치고 선거 결과가 그렇게도 의외였던 것은 그만큼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높고, 정치욕구가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소. 그런 대중들은 정치인들의 타락이나 권력의 배신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그러니 해결도 되지 않을 쓸데없는 지식인적 고민 집어치우고 대중의 한 사람으로 정신이나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다가 그런 시기가 닥치면 행동이나 제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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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6 (무선) - 제3부 분단과 전쟁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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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생각으로는 이놈의 세상이 달라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소. 그게 뭔가 하면, 기왕 썩은 세상이니까 한 이삼 년 더 푹푹 썩게 내버려두는 거요. 권력이 썩을 대로 썩다보면 제물에 무너지게 될 거고,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의 불 만과 불신은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 이 뒤집어질 것 아니겠소. 종기야 곪을 대로 곪아야 뿌리가 빠지는 법 이니까요."
 "글쎄요, 그게 이삼 년이 아니라 이삼십 년이 걸리면 어찌 됩니 까?"
"글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돌아가는 형편으로 보아 이런 식의 권력의 횡포와 부패를 대중들이 그렇게 오래 참으리라 생각되진 않소."

권력지배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고조되면서 광범위하게 일체감을 이루게 되고, 그러면서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자체 균형을 상실하게 되면, 그건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계기가 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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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부정당하는 사회. 그 이유는 가장 인간적이어야할 종교가 비인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에는 불교와 기독교의 두 대표 인물 법일 스님과 서민영이 등장한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의 사상과 종교적 신념.

법일은 선암사 부주지로, 절의 사답을 소작인에게 나눠주고 절의 반대파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순천 감옥에 수감 된다. 고문을 당해 빗장뼈가 부러진 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인생 사고에다 아고를 하나 더 첨가해야 한다며 처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부처의 고행을 몸소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염불이나 일삼는 상식적인 승려도, 해탈이나 꿈꾸는 몽상적인 승려도 아닌 남다르게 투철한 실천불교 사상을 지녔다. 중생제도란 당대의 가장 중요한 인간의 문제를 석가모니 같은 태도의 실천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라고 설파 한다.

법일이 실천불교 였다면, 서민영은 실천기독교 이다. 아리랑의 신세호를 연상케 한다.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직농의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영농법을 개발실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활용시킨다. 기독교재단 순천 매산학교, 동경제대 영문과 졸업, 광주사범학교 영어 선생, 야학 교장으로 독립정신 애국정신을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었으며, , ‘이상 농촌의 건설‘을 지향 한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한때 염상진, 안창민,김범우, 손승호 등이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41년 치안유지법에 저촉되 공산주의자로 몰려 일년 육개월 실형을 살았으며, 그때 당한 고문의 상처로 왼쪽 절름발이가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농촌문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거나, 책 읽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다 기독교의 물량주의를 비판하며 자신의 농토 전부를 공동농장화하고, 야학을 개설 한다. 벌교 읍민들의 존경의 대상이며, 정신적 지주이다. 투철한 기독교 신앙인 이면서도 타 종교에 대한 배척이나 불신에 반대 한다.

법일과 서민영은 종교적 입장에서 사회개혁의지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도 이런 의지할 수 있는 큰 종교 지도자가 있었으면 한다.


(p230) "하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상호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생존해나갈 수 있는 질서와 지혜를 주셨지, 그 질서를 인간의 말로 하자면 먹이사슬이고, 지혜는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나 갈무리가 되겠지. 그런데,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늘의 뜻을 겨역한 존재가 일찍부터 있었어, 그게 바로 인간이야, 인간의 역사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악용해가며 인간끼리 살육을 되풀이해온 기록에 불과해, 뱀이나 개구리가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를 하나 다음해 봄까지 빈사상태로 견딜 수 있을 정도만 하는 것이고, 개미나 벌이 겨우살이 갈무리를 하지만 마찬가지로 해동이 될 때까지 필요한 최소량의 먹이만을 보관해,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다음해 봄까지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을 위해,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손대대로 이어질 갈무리를 하고자 탐욕한 것이야, 그 탐욕의 부가 상대적인 빈을 낳게 되고, 더 큰 탐욕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필연적인 폭력이 조직화되고, 그 폭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또 다른 힘이 결속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살육이 자행되는 것 아닌가, 먹이다툼을 해서 동류끼리 살육을 자행하는 것도 인간뿐이야. 동류끼리 상대방의 생활터전이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모든 동물들의 불문율이네, 동물들이 동류끼리 싸우는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나 그건 먹이 때문이 아니라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힘겨룸이지, 힘세고 건강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함으로써 우량한 새끼를 낳게 하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싸움이 아니라 종족 보존을 위한 신성한 의식 아닌가, 그런데 인간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무어라고 했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신의 섭리를 거역한 존재로서 당연히 저지르게 된 자만이야. 탐욕과 자만으로 가득 찬 인간사회는 착위를 위한 폭력이 조직화되고 상태적으로 인간의 노예화와 굶주림이 상습화되었네. 모든 만물은 신의 섭리에 따라 골고루 나눠 먹고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데 인간만은 헐벗고 굶주려 죽어갈 수밖에 없게 된 거야. 그건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지옥이지, 그 지옥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이겠나, 파멸이지. 그 극점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가들을 일깨우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신 것야,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면 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었네. 곧, ‘박애의 실천‘으로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일깨움이었지.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일깨움을 알아듣지 못했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한다는 성직자들까지 인간의 탐욕과 자만을 키워 하나님을 욕되게 했네. 인간이란 탐욕과 자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사상을 내세워도 거기에는 또 다른 모순과 불합리를 내포하게 마련이야, 나로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근복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고,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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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병란을 계기로 무장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투쟁의 제삼단계 전환이라고 안창민은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었다. 제일단계가 당의 재건과 함께 이루어진 합법투쟁이었고, 제이단계가 미군정에 의한 활동 불법화로 지하투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그 일방적 탄압과 파괴의 폭력행사 아래서 당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제한된 폭력의방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손승호는 그 방어적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없는 필연성을 납득하지 못했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건 손승호의 억지였을까, 아둔이었을까, 한계였을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삶의 가치나 방향을 달리한 관념주의자였다.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삶의 모순과 제도의 폐단을 외면한 체 결과부터 끌어다가 부정적 가치관을 설정하여 행동을 포기하는 전형적인 관념론자의 허무적 모습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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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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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고통이란 고통을 주는 자가,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바라보면서 즐길 수 있을 때만 참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하고 변태스러운 말이다. 이 말은 니체가 " 도덕의 계보학"에서 ‘고통‘의 가치를 설명한 것이다.
니체는 ‘고통‘을 "야기된 손실 = 감수해야 하는 고통"으로 본 것이다. 이런 니체의 시각을 서동욱 문학평론가는 그의 책 ‘생활의 사상‘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채무자는 자신의 육체가 받는 고통을 값으로 치르고서 빚에서 해방되고, 채권자는 채무자가 겪는 고통을 보고 즐김으로써 빚을 돌려받는다. 둘 다 채무 관계에서 해방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끼치는 처벌의 행사는 괴로움보다는 오히려 ‘축제‘와 ‘놀이‘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진정한 의미의 ‘고통‘ 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온갖 죄의식과 가책의 억압 속에 빠져 있다. 고통이 단지 화해와 해방의 축제‘ 처럼 여겨진다면 죄의식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
이에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통하여 니체가 말한 인간 본성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인 신성에 기반을 두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편을 이렇게 시작하면서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일축한다.
사람은 고통을 일으키며 태어나, 고통을 가하며 살다가, 대부분 고통 속에서 죽는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그런 세상을 만드셨을까?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일까? 하는 하나님의 선함을 의심하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세상 살이가 팍팍해지고, 어수선하고, 큰 사고가 날 때마다, 하나님의 전능함에 의심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그냥 보고만 계실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어도 고통의 문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과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반박들을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통은 하나님의 "사이렌"이다. 엄마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 안돼,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혼난다‘라고 하는 ‘경고‘이다. 고통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낸 게 다반사이다. 인간의 탐욕 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뭐 낀 놈이 성낸다고. 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자기 맘대로 일을 벌여놓고 뒷감당이 안될 때 도와달라고 떼쓰는 자식들처럼,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고통은 너무도 힘이 든다. 그럴 때는 차라리 하나님이 인간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만 보고 계시지만 말고, 자유의지고 뭐고 간에 다 알아서 사전에 차단하고 막아주고 해달라 요구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한계적 착각이, 자기 회피성이 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곤 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해 주시고, 어떤 요구를 해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라는 착각에 빠져 슈퍼맨처럼 날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월드컵 경기에서 서로 자기네 나라가 우승하게 해달라는 기도. 대입 시험에서 모든 믿는 자녀들이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 등등.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인이 용서하려고 면회 온 전도연에게 자신은 하나님께 회개하여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전도연은 살인자의 평화로운 모습과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누가 먼저 용서 할 수 있냐며 고통 속에 분노 한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솔직함‘은 싸구려에 불과하다. 죄의식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연히 늘 화만 내고 있는 분으로 여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인간의 연약함 탓으로 돌린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을 눈 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존재일 수가 없다. 그건 자기 몸에 악취가 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코가 없어져 다시는 어떤 피조물도 냄새를 맡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태도나 다름없다."
"말로만 자신이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야만적인 교리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지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된다."

최책을 씻어 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설사 죄들을 회개했다 해도, 그 죄가 사해 지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기억하고 겸손해야 한다. 신앙적으로 회개하되 법적인 처벌을 받으며, 상대방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책을 면하는 것이다.
잊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묻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영원히 지고 가는 것이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얘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함과 선함, 인간의 악함, 인간의 타락, 안 간의 고통,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을 얘기하면서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 해결 책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너무도 심도 있고 깊이가 있어 한 번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힘겨움이 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거볍게 읽고 도전하였다가 헉, 하는 어려움에 앞장으로 돌아가는 수고에 수고를 거듭하며 겨우 완독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을 세상에 억지로 짜 맞추어 증명하려 들지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단편적이고 일차원적 문제로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다 읽고나면 고통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지적인 문제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에 강력한 반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치 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변덕에 따라왔다 갔다 하는 세상에 들어와 살게 된다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이며,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물질의 모든 상태가 한 영혼의 요구에만 한결같이 잘 들어맞는다거나 그 영혼이 몸이라고 부르는 특정 물질의 집합체에만 한결같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쪽 사람에게 내리막길은 저쪽 사람에게는 오르막길이다."

고통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거나고, 오감을 느끼듯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삶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자연법칙이다.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http://aladin.kr/p/JFr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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