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고통이란 고통을 주는 자가,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바라보면서 즐길 수 있을 때만 참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하고 변태스러운 말이다. 이 말은 니체가 " 도덕의 계보학"에서 ‘고통‘의 가치를 설명한 것이다.
니체는 ‘고통‘을 "야기된 손실 = 감수해야 하는 고통"으로 본 것이다. 이런 니체의 시각을 서동욱 문학평론가는 그의 책 ‘생활의 사상‘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채무자는 자신의 육체가 받는 고통을 값으로 치르고서 빚에서 해방되고, 채권자는 채무자가 겪는 고통을 보고 즐김으로써 빚을 돌려받는다. 둘 다 채무 관계에서 해방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끼치는 처벌의 행사는 괴로움보다는 오히려 ‘축제‘와 ‘놀이‘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진정한 의미의 ‘고통‘ 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온갖 죄의식과 가책의 억압 속에 빠져 있다. 고통이 단지 화해와 해방의 축제‘ 처럼 여겨진다면 죄의식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
이에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통하여 니체가 말한 인간 본성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인 신성에 기반을 두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편을 이렇게 시작하면서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일축한다.
사람은 고통을 일으키며 태어나, 고통을 가하며 살다가, 대부분 고통 속에서 죽는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그런 세상을 만드셨을까?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일까? 하는 하나님의 선함을 의심하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세상 살이가 팍팍해지고, 어수선하고, 큰 사고가 날 때마다, 하나님의 전능함에 의심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그냥 보고만 계실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어도 고통의 문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과연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반박들을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통은 하나님의 "사이렌"이다. 엄마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 안돼,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혼난다‘라고 하는 ‘경고‘이다. 고통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낸 게 다반사이다. 인간의 탐욕 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뭐 낀 놈이 성낸다고. 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자기 맘대로 일을 벌여놓고 뒷감당이 안될 때 도와달라고 떼쓰는 자식들처럼,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고통은 너무도 힘이 든다. 그럴 때는 차라리 하나님이 인간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만 보고 계시지만 말고, 자유의지고 뭐고 간에 다 알아서 사전에 차단하고 막아주고 해달라 요구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한계적 착각이, 자기 회피성이 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곤 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해 주시고, 어떤 요구를 해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라는 착각에 빠져 슈퍼맨처럼 날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월드컵 경기에서 서로 자기네 나라가 우승하게 해달라는 기도. 대입 시험에서 모든 믿는 자녀들이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 등등.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인이 용서하려고 면회 온 전도연에게 자신은 하나님께 회개하여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전도연은 살인자의 평화로운 모습과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누가 먼저 용서 할 수 있냐며 고통 속에 분노 한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솔직함‘은 싸구려에 불과하다. 죄의식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연히 늘 화만 내고 있는 분으로 여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인간의 연약함 탓으로 돌린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을 눈 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존재일 수가 없다. 그건 자기 몸에 악취가 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코가 없어져 다시는 어떤 피조물도 냄새를 맡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태도나 다름없다."
"말로만 자신이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야만적인 교리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지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된다."
최책을 씻어 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설사 죄들을 회개했다 해도, 그 죄가 사해 지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기억하고 겸손해야 한다. 신앙적으로 회개하되 법적인 처벌을 받으며, 상대방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책을 면하는 것이다.
잊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묻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영원히 지고 가는 것이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얘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함과 선함, 인간의 악함, 인간의 타락, 안 간의 고통,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을 얘기하면서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 해결 책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너무도 심도 있고 깊이가 있어 한 번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힘겨움이 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거볍게 읽고 도전하였다가 헉, 하는 어려움에 앞장으로 돌아가는 수고에 수고를 거듭하며 겨우 완독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을 세상에 억지로 짜 맞추어 증명하려 들지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단편적이고 일차원적 문제로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다 읽고나면 고통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지적인 문제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에 강력한 반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치 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변덕에 따라왔다 갔다 하는 세상에 들어와 살게 된다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이며,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물질의 모든 상태가 한 영혼의 요구에만 한결같이 잘 들어맞는다거나 그 영혼이 몸이라고 부르는 특정 물질의 집합체에만 한결같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쪽 사람에게 내리막길은 저쪽 사람에게는 오르막길이다."
고통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거나고, 오감을 느끼듯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삶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자연법칙이다.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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