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5 - 고국원왕, 백성의 왕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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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라성 같은 패자들이 등장했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격동의 시대. 오로지 백성만을 생각하기에 그 어느 누구의 인정도, 지지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왕이자 아버지 사유를 보면서, 진정한 '제왕의 도'는 무엇이며 제왕들의 통치 이념이 무엇인지 알고자 구부는 천하를 떠돌며 그들을 만나 문답을 한다.

"길을 가는데 길가에 죽은 농부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소를 보았습니다. 소는 이미 시체가 된지 오래인 제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더군요, 굶어 죽을까 걱정하여 몇 번 쫓았으나 그 미물은 결코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농부 - 왕, 소 - 백성)

가장 먼저 만난 백제의 부여구(근초고왕)는 의리로 자신과 백성을 엮었다. 두 번째로 만난 연 나라 모용황은 채찍으로 백성을 다스림을 말했다. 세 번째 조 나라 석호는 불심으로 백성과 자신을 이김을 말했다. 천자의 제후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구부는 고구려로 돌아와 아버지 사유에게 물었다. "농부가 밉구나. 제가 죽을 것을 알았으면 소를 어디에라도 보냈어야 하지 않겠느냐, 농부가 제 생각만 하였으니 소가 그리 굶는 것이 아니겠느냐.'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구부는 생각한다. 의리나 채찍이나 불심이나 모두가 과하거나 모자라면 백성과 왕을 해치게 된다. 또한 군주 개인의 용단에 따른 방편인지라 오래지 못하여 빛이 바래고 만다. 그러나 '법' 이란 세상만사 과하고 모자람의 기준을 정하는 것. 법을 올바로 제정하여 군주와 백성 모두가 엄격히 따르도록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방편의 장점을 취함과 동시에 단점은 버리는 길이라 가장 올바른 치국의 길이 될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구부는 왕위에 오른 뒤 율령을 반포한다.

몇 해 전 '워낭소리'라는 독립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었다. 농부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애틋한 이야기기로 많은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
소는 보통 15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데 40년을 산 소. 소는 30년 동안 할아버지를 태우고 들에 나가 함께 일했다. 할아버지는 소를 위해 농약을 쓰지 않는다. 아픈 다리를 끌고 소가 먹을 꼴을 베고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쇠죽을 끓인다. 귀가 어두워 할머니의 잔소리는 잘 듣지 못하지만 워낭소리엔 눈이 번쩍 뜨인다. 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할아버지를 태운 소의 걸음걸이는 한없이 느리다. 할아버지는 재촉하지 않는다.
결국 소가 먼저 할아버지 곁을 떠났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는 소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할아버지의 눈엔 슬픔이 가득하다. 소가 평생을 일하며 보낸 밭 한가운데 무덤을 만들어주고 할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았다.
함께 힘겨운 삶을 견뎌낸 동지를 잃은 할아버지. 그 상실감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자신이었다. 사유가 할아버지로 환생한 듯하다.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여 자신이 먼저 뺨을 맞고 싸움을 끝내려 한 왕. 상대가 뺨을 치기도 전에 오른쪽과 왼쪽 뺨 모두를 내민 왕. 소설은 소설로 읽자. 픽션. 작가의 상상력과 창작력에 고구려를 읽는 내내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며 읽었다.

가장 아쉬웠던 장면. 작가도 과한 상상력에 아쉬윘던 것일까? 변명 아닌 변명과도 같은 썰을 푼다.
(태왕 사유는 왜? 스스로 모용황을 찾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을까?)

"수많은 신념과 수많은 희생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무대. 노장 형대가 목숨으로 피워 올린 봉화, 그릇된 명을 죽음으로 묻었던 전령, 충의와 의리에 더하여 제 목숨까지 잃은 평강, 역적의 오명을 쓰면서까지 환도성을 사수하려던 중신들 최후까지 고구려의 선봉이었던 아불화도,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바랐던 호국의 혼은 결국 태왕 일인의 한 마디에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작가는 모용황의 입을 빌려 태왕 사유를 간도, 쓸개도, 염통까지도 내놓은 놈.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초라하고 비겁한 왕이었다고 말하지만 작가는 사유를 너무도 선하고 어질고 이상적인 왕으로 그리고 있다.

"사유가 어떤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 왈 "밭을 갈아줄 농부가 죽었잖습니까. 소는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인데 농부가 죽었으니 누가 함께 밭을 갈아줍니까. 제 밭을 갈도록 씨를 뿌려줄 농부가, 수확을 하여 여물을 먹여줄 농부가 죽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에게는 농부가 제 일꾼이었다."

왕이 백성의 일꾼이라 생각했던 왕이 이었던가? 지금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울 수 있는 통로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낮은 곳을 바라보며 백성을 주인으로 섬겼던 진정한 목민관을 볼 수 있다. 목민심서는 고을 수령에게 필요한 지침서이나 지금의 위정자에게도 좋은 지침서이다.

#1. 이 날 사림과 일반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려
무엇이 이 고을의 고민인가를 묻고 진언(進言)을 요구한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여론을 수렴한다)
1편 6조,

#2. 청렴하게 한다는 것은 수령된 자의 본연의 의무로서, 온갖 선정의 원천이 되고 모든 덕행의 근본이 된다. 청렴하지 않고 목민관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은 아직 없다. (정치자금 투명)
2편 2조,

#3. 자기 몸을 바르게 가진 후에 집안을 바로 다스릴 수 있고, 집안을 바로 다스린 후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천하에 공통된 원칙이다. 그러니, 고을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바르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친인척 비리 단속)
2편 3조,

#4제. 방을 수리하고 성을 쌓는 일에 차원으로 가서 감독하게 되면, 기쁘게 백성들을 위로하여 인심을 얻도록 힘써야 일이 성공할 것이다.
3편 6조,

#5. 곱사등이나 불치 병자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갈 수 없는 자는 의지할 곳과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회복지제도 마련)
4편 5조,

#6. 장래의 환난을 미리 생각하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재난이 일어난 뒤에 은전을 베푸는 것보다 낫다
4편 6조,(재난 대비)

#7.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일은 사람을 잘 등용하는 일에 달렸다. 군현이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은 나라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청탁 금지)
5편 3조, 4편 6조,

#8. 백성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사를 일으키는 일은 신중하게 하되, 되도록 줄이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하여서는 안 된다.
6편 5조, (국책 사업 남발 금지)

#9.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한다. 비록 흉악한 불효자일지라도
일단 가르치고 나서 고치지 아니하면 죽일 것이다.
7편 3조,

#10. 수령은 병부를 지니고 있는 관원이다.
기밀한 일에 뜻밖의 변고가 많으므로 대응하는 방법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8편 5조,

#11과. 가로막혀 통하지 못하면 백성의 사정은 답답하게 된다. 달려와 호소하고 싶은 백성으로 하여금 부모의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게 한다면
어진 목민관이라고 할 수 있다.
9편 1조,

#12과 강과 역에 해마다 홍수의 피해로 백성들의 큰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제방을 만들어서 그들이 안심하고 편히 살게 하여야 한다
10편 2조,

#13과 흉년이 든 해에는 반드시 전염병이 퍼지게 마련이다. 그 구제하고 치료하는 방법과 거두어 매장하는 행정에 마땅히 더욱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11편 4조,

#14과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그다지 혁혁한 명예가 없거나 떠난 후에 백성들이 사모하는 것은, 그가 자기 공적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남모르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12편 6조

http://aladin.kr/p/0Lr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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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4 - 고국원왕, 사유와 무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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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의 태자. 고구려의 사유 vs 모용부의 모용황
비운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장자 사유와 차자 무.
온순함을 넘어 유약해 보일 정도의 사유는 평화주의자이며, 전쟁 반대론자이다. 을불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닮아 백성들의 손에 창과 칼 대신 농기구를 쥐여주는 왕이 되고자 한다.

" 싸움이 나라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란 물러서고 물러서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싸우는 게 강한 것이지만, 세상에는 물러서는 강함이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전쟁에 백성들의 희생이 날로 더해지자 태자의 지위로 스스로 모용부에 사신으로 가기를 청한다.
" 세상이 강자의 것만은 아니고, 싸움이 나라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외교가 있는 것일 테지요."

한참 세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고구려에게 외교 정책은 시기 상조였다. 위로는 요동에서 한참 세력을 확장해 가는 모용부와 하성에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으며, 아래로는 백제와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인 머리 숙임의 외교는 상대에게 빌미를 주는 격이 되어버렸다.
을불이 활달하고 무예가 뛰어난 차자 무가 아닌 온순한 사유를 태자로 책봉한 이유 또한 사유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군주란 또 무엇이요?!
항상 전쟁에 이기며 모든 백성들을 싸움터로 몰아내는 용맹한 군주에 비해 전쟁에 지더라도 백성을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옹졸한 군주가 못하지 않다는 걸 말이요. 군주는 백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광을 이루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오, 무는 너무 전쟁을 잘할 아이요. 백성의 수효도 얼마 되지 않는 이 고구려의 장정들은 그 아이을 따라다니며 끝도 없이 목숨을 잃고 팔을 잃고 다리를 잃을 거요. 태자로는 사유가 맞소! "

톨스토이 소설 '바보 이반의 이야기'에서 왕이 된 바보 이반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백성과 나라를 지켜낸다. 이반이 바보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을까?, 전쟁을 일삼는 다른 나라 왕들이 바보 보다 못한 것일까? 사유는 바보 이반처럼 나라를 다스리고 싶었다. 백성들과 함께 평화롭게 묵묵히 밭을 일구며 살고 싶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 아니라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밀어 백성을 평화롭게 지키는 왕이 되고 싶었다.

사유와는 정 반대의 왕을 꿈꾸는 모용 황은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신의 나라는 오직 강하고 위협적 이어야만 했다. 아버지 모용외가 옛정에 연연하여 부족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을 그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약한 왕, 나약한 나라는 자신에게 필요치 않았다. 모용외는 나라를 병들게 만드는 전염병이었다. 그가 왕위를 찬탈 한 이유이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정치학 논고'의 내용은 모용황의 행동을 잘 대변하여 주고 있다.

"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범죄로 취급될 때, 그리고 신과 인간에 대해 경건함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을 악한 것으로 금지할 때 가장 분통을 터뜨리게 되어 있다. 그와 같은 경우, 그들은 기꺼이 법을 부정하며 자기의 목적을 위해 반역을 선동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음모를 획책하며, 대의를 위해 서라면 어떤 폭력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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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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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기독신학에서 예수의 신성에 초점을 맞춘 일반적 정의이다. 또 다른 측면은 오직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 예수로 정의하는 부류이다. 신성으로써의 예수와 혁명가로서의 예수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논쟁되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 김규항은 B급 좌파 라고도 불리는, 진보주의 사회문화비평가이다. 그만큼 사상과 글에 있어서 색이 강하고 저돌적이다. 주진우 기자와 적을 같이하고 있다. 그가 쓴 '예수전' 은 마르코복음(마가복음)을 읽고 느낀 점을 지극히 주관적 입장에서 풀어쓴 것이다.(외전에 비중을 많이 둠)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였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를 바탕으로 쓰였다.)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간사 역에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정열의 삶의 복음서이며, 생생한 사실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에 해석 없이 서술함으로, 생생한 현장감과 생동감, 긴박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예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사용되지 않은 독창적인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두스(euthys)"라는 단어는 곧, 즉시, 당장이라는 의미로 문장에 생동감과, 긴박감을 더해주며, 다른 복음에서는 "이끌리다"로 유순하게 표현하였으나, 마가는 "몰아내다"라는 강하고 저돌적인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런 부분이 저자가 마르코복음을 선택한 이유인 것 같다. 강력하고, 활동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이 저자와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저자는 결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육신의 몸으로 인간의 사역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예수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그저 앉아서 명상이나 하고 개인의 득도와 해탈을 위해 노력하며, 깨달음을 설파하는 몽상가가 아니라. 직접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어 소외당한 민중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약자들의 대변인. 민중을 가르치고 돌보아준 실천가로 이야기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기존 보통의 보수 교단 소속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책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의 신성, 영적인 가르침이 아닌, 오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이 책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해방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예수가 몸소 보여준 것처럼 교회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교분리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정교분리 원칙' 이 나온 배경은 중세 시대에 교회가 스스로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어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타락한 역사 때문이다.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관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군사 파시즘 기간의 한국의 보수 개신교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유대 본토는 거의 약탈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세금 정책으로 인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방인(로마) 교회들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환난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다. 인권을 박탈당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고난 한 인생을 살다가 지배계급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치적 혁명가, 위대한 혁명가로 그리고 있다.

.p137(마가복음 8:27~34)
"예수에게 해방은 이스라엘의 해방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안에서 인권을 잃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삶이 변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사실 그런 관점은 계급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 오늘 세상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계급은 인민들로 하여금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 보지 못하게 하려,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뭉뚱그려 보게 하려 애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민족', '위대한 로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따위로, 그래야만 그 민족이나 국가 안에서 계급 간의 억압과 착취를 숨길 수 있다. 예수가 살던 세상엔 아예 계급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그런 관점을 자질 수 있었을까?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이 삶을 만든 게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 개념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걸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어설픈 인문주의자들에게 보듯 개념이 곧 지시하는 내용 자체인 양 오해하여, 그 개념이 다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념의 체제에서만 관념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개념이 없이도 혹은 개념을 몰라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에 이미 충만할 수 있음을 예수는 보여 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며,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달으며, 예수가 소외된 민중에게 애끊어하며 친히 찾아가 구제하였듯이 우리도 주변 이웃에게 애끊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 사랑으로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막1:41) "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는 난생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병자는 누구보다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너무 반감을 갖지 않고 또 하나의 외서를 읽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듯하다. 예수에 대한 독특한 표현이나, 말씀하신 비유와 행한 사건과 이적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문화적 설명이 성경 이해를 쉽게 해주는 면도 있다. (초신자,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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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3 - 미천왕, 낙랑 축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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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지루했던 2권을 지나 드디어 낙랑을 향한 미천왕이 출사표를 던진다.
*10년의 '와신상담'*
미천왕 14년 9월

" 마침내 고구려의 모든 장수들은 휘하의 병력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평양성에 모였다. 태왕 을불, 국상 창조리 할 것 없이 문무 신료들이 모두 군장을 갖춰 입고 있는 가운데 을불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높이 쳐들고는 천지가 떠나갈 듯 쩌렁쩌렁 한 음성을 외쳤다.
"낙랑을 멸하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전장의 긴박함과, 박진감이 생생하게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최비와, 창조리의 주고받는 지략 대결과 고구려 군의 기마병 대 낙랑군의 장창 방진은 창과 방패의 접전을 보여 준다.

*명장면 기마병 vs 장창 방진 대결*
(아달휼이 이끄는 숙신 기병과, 여노가 신성에서 고안해낸 경갑기병의 활약이 시작된다.)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노의 기마병. 순식간에 좌측면을 파고든 이들은 그야말로 현란한 기마술과 창술을 뽐내며 낙랑군을 베어 나갔는데, 기묘하게도 낙랑군의 공격은 이들의 손목이나 팔꿈치 등에 덧댄 철판에 대부분이 막히니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들은 너무나도 빨랐다. 한쪽을 쳤다가 번개같이 말을 돌려 다시 멀어졌다가 미처 준비를 못 한 곳을 치기를 반복하는데, 낙랑군은 흩어진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자꾸만 이들에게 등 뒤를 내주니 속절없이 죽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타를 가한 것은 뒤이어 나타난 아달휼의 중갑기병이었다. 말과 사람이 모두 온몸에 쇳덩이를 달고 뛰어드는데 미처 병장기조차 겨누지 못한 낙랑군이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이들은 들이받고, 짓밟으며 무인지경을 지나듯 전장 한복판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고구려 중갑기병 vs 낙랑군의 장창 방진*
기병도, 기수도, 궁수도 없는 창과 방패만으로 이루어진 진형인 '장창 방진". 관구검이 동천왕을 맞아 펼쳤던 대 기병 전술. 연전연승의 고구려 중갑기병을 한순간에 전멸시키고 고구려 영토의 반을 짓밟았던 장창 방진.

"고구려의 철기 군이 안전의 선봉군을 헤집는 사이, 낙랑군 본대의 방진은 이미 전장에 이르러 있었다. 방진을 펼친 군사의 갈래는 세 무리. 이 세 갈래의 군사가 혼란을 틈타 전장을 감싸듯 다가오자 양우의 선봉군과 두 갈래 철기 군은 방진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각기 이만씩 세 무리로 나뉜 낙랑군 본대의 육만 군사는 모두가 같은 복색과 같은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말은 탄 자도, 깃발을 든 자도, 칼을 든 자도, 활을 든 자도 없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늘어선 채 같은 길이의 장창을 들고 있었다 다만 선두의 병사들만은 무기를 놓고 튼튼한 방패를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 일열과 이열은 방패를 들고, 삼열과 사열은 방패 사이로 창을 지른다." " 전열의 병사가 죽으면 후열의 병사가 바로 그 자리를 충당한다."

관구검의 장창 방진을 절묘하게 개량한 손정. 난전의 난전. 창칼을 튕겨내는 방패의 벽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철기 병의 몸에 온 힘을 실은 장창이 꽂혔다.
"이 자리에서 죽어 고구려의 기틀이 된다!" 한마디의 비장한 외침과 함께 양우는 손정의 방진으로 뛰어들었다. 가시덤불처럼 조여 오는 장창 방진. 이와 양우의 군사들 사이에 다시금 일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고구려 군의 창은 방패에 막혔고, 그 방배 사이로 내어진 낙랑군의 창은 고구려 군의 몸을 꿰뚫었다.
*양우의 희생, 아달휼의 뛰어난 전술 분석, 창조리의 지략. 낙랑군의 '장창 방진'을 무너뜨리다*
"방진의 강점이 곧 약점"
"적은 거대한 고목과도 같습니다. 한 번 패이면 제 무게를 못 이겨 쓰러집니다. "한 번 흐트러진 방진은 여럿이 함께 들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이 길고 무거운 무기들은 일단 대오가 흐트러지면 무용지물로 변했다.

*소꼬리에 불을 놓아 적의 방진을 흔들다.*
"낙랑군의 등 뒤 멀찍이서 불덩이 수천 개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곧이어 터져 나온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신호로, 그 불덩이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를 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짧은 뿔이 달린 커다란 몸집의 짐승 무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소떼였다. 꼬리에 불이 붙은 소떼 이천여 마리가 고통에 정신을 잃은 채 낙랑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졸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창을 놓고 몸을 피하는 자가 태반, 미처 피하지 못한 병졸들을 향해 불붙은 소떼가 육중한 몸을 들이박았다. 그토록 탄탄하던 방진의 벽이 일순간에 흔들렸다. 방패는 애초에 소용이 없었고 내지른 창은 두꺼운 소가죽에 박힌 채 부러졌다. 힘에 밀려 넘어진 병사들 위로 수없는 소떼의 발굽이 떨어졌고, 버티는 이들의 가슴팍엔 소뿔이 박혔다. 그 뒤를 이어 기마병들이 측면을 거칠게 공격했다.
"양우의 희생, 국상의 계략, 그들이 만들어준 작은 틈. 그 하나가 고목을 무너트린다."
방진이란 너무도 정교하게 짜인 탓에 일단 흔들리면 돌아올 수가 없었다. 적수공권의 낙랑 병이 그 위명 높은 고구려 철기 병을 상대할 방법이 있을 이 없었다.

*낙랑성 탈환*
최비는 패배를 시인하고 손정에 자리를 물려주고 홀로 사라졌으며, 손정 또한 고구려 군의 낙랑성 총 공세에 몇몇 장수들과 도주를 하였다. 이로써 미천왕은 낙랑성을 탈환하였다.
"최비 대신 태수부에 앉아 한족 추방령을 내리는 을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창조리와 여노 등의 신료는 물론 일반 장졸들, 그리고 유민들의 눈에서도 한결같이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써 고구려는 마침내 사백 년간이나 조선 땅을 지배해온 낙랑을 완전히 축출했다. 을불은 낙랑의 모든 한족을 추방한 후 조선 유민들을 고구려 백성으로 편입시키고 고구려 각지의 백성을 낙랑으로 이주하도록 하는 조칙을 발표한 후 날을 잡아 순국 장졸을 위한 위령제를 거행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
미천왕 4년 창조리는 신성의 철 전량을 낙랑에 교역품으로 받치는 것에 격분하여 낙랑과 싸울 준비를 하는 미천왕에게 10년의 세월을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 무릇 전쟁이란 군사의 수가 사기, 그리고 갖추고 있는 장비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오, 여기에 장수의 능력이 더하면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나름대로 갖추었다고 볼 수 있소, 하니만, 그전에 우선 있어야 할 것이 있소'
'하나는 백성의 호응이요, 비록 전장에서 창칼을 쓰는 건 군병이지만 모든 전쟁은 군사를 내기 전에 이미 승패가 갈리는 법이요, 곧 백성이 마음으로부터 호응하면 그 전쟁은 져도 이긴 것이요. 백성이 마음으로부터 거부하면 그 전쟁은 이겨도 진 것이기 때문이오."

이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력의 우세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던 '월남전 '이나 '걸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걸프전으로 미국은 큰 실패를 경험했다.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부도덕하고 실패한 전쟁이다. 당초 전쟁 명분은 이라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위반해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 국민에 대한 잔혹한 학살과 박해로부터 독재자 제거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9·11 테러 배후 세력 응징을 내세웠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으며, 세계 곳곳에서는 반전시위가 잇따라 열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목적이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이라크의 원유 확보에 있다는 비난이 일었으며, 민간지역에 대한 오폭 등으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비난의 강도도 더욱 거세졌다.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 없이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건, 영토를 되찾는 것이건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힘없는 병사들과 백성들이다.
낙랑성 앞에 묶여있던 고구려 유민들의 외침이 서글프게 귓전에 울린다.

"나아갑시다! 고구려 태왕이 우리의 주검을 딛고 저 안에 들어가 우리 자식들을 구해줄 수 있도록 우리가 성문을 두드립시다"
"더 쏴라! 더 쏴 보란 말이다!"
"죽여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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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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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불평등의 시작은 벼농사가 시작 되면서 개인의 축적이 시작되었던 청동기 때부터 이다. 청동기를 쓰면서 계급에 의한 지배층이 생겨 났다. 5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별이 있었으니 없어 지기가 쉽지 않다. 표면적인 불평등이 청동기때 부터이지 아마도 구석기 때에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탄생 된 때부터 차별은 시작 되었다고 봐야 할것 같다. 인간의 내제된 의식속에 차별의 유전자가 있는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일상에서 행하는 무의식적 차별에 대해서 얘기 한다. 우리가 얼마나 차별을 보지 못하는 지와 차별이 어떻게 지워지는지, 어떻게 '정당한 차별'로 위장 되지는를 알려 준다. 마지막에 가서는 차별에 대한 우리의 제세를 얘기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고정관념은 무언가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범죄자를 생각할 대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극단적인 악인을 상상한다.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을때 가해자를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자에 대한 과장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 성은 사실 거의 없다."

국민학교때 유독 2차 성징이 빠른 아이가 있었다. 그때 우리들의 눈에는 이상하고 비정상으로 보였고 무서웠다. 몇몇이 모여 수군덕 거리기도 하고, 고무줄놀이할 때도,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끼워주지 않았다. 우리와 다르다는게 무리에 들이지 않은 이유였다. 그 아이는 소수 이지만 자기와 비슷한 아이들과 어울렸다. 숫자가 많은 우리는 늘 당당했고 큰 소리 쳤다. 어리지만 무리 짓는 법과 구별을하고 차별하는 법을 오랜 학습을 통해 배웠던것 같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차별, 집단이나 공동체 속의 차별 이다. 우리는 다수의 무리에 들기 위해서 혹은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 암묵적 차별을 자행한다.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무리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무리 밖으로 쫓아 내야 한다. 재화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어울림의 공포라고 말한다.

그러니 차별은 구석기 때부터 시작된게 맞는것 같다. 우리가 흔히 하는 '억울 하면 출세 해', "누가 공부 못하래", "난 선택 장애야"라는 말들이 다 차별에서 오는 말 이란다.

작가는 이 책을 쓴 이유가 어울림의 공포와 싸우는 한가지 방안을 말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소속되기 위해 '완벽한' 사람이 되려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는 대신,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고 이야기 한다. 최소한 내가 배척당할까봐 두려워 다른 누군가를 비웃고 놀리고 짓밟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모두를 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를 꿈꾼다.

이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정말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중에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
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같은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 세우긴 커녕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내면이 강한 사람은 강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말로써 상대방을 감싸버린다. 강한 말투는 자신을 확신할 수 없어서 이며,약함을 포장하기 위함이다. 활화산 같은 말은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으며 나와 상대방을 태워 버릴 뿐이다.

'낙인 효과'는 말로써 누군가의 인격과, 사회적 위치를 지정해 버리는 권력의 횡포라고 한다. "너는 늘 그래", "니네 나라는 ~~하잖아" "넌 너무 바보 같아" "~~ 주제에", " 네가 할 수 있겠어" 라는 말들로 나는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는 권력을 횡포하지는 않는지 주의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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