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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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기독신학에서 예수의 신성에 초점을 맞춘 일반적 정의이다. 또 다른 측면은 오직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 예수로 정의하는 부류이다. 신성으로써의 예수와 혁명가로서의 예수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논쟁되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 김규항은 B급 좌파 라고도 불리는, 진보주의 사회문화비평가이다. 그만큼 사상과 글에 있어서 색이 강하고 저돌적이다. 주진우 기자와 적을 같이하고 있다. 그가 쓴 '예수전' 은 마르코복음(마가복음)을 읽고 느낀 점을 지극히 주관적 입장에서 풀어쓴 것이다.(외전에 비중을 많이 둠)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였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를 바탕으로 쓰였다.)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간사 역에 초점을 맞추어 쓰였다. 정열의 삶의 복음서이며, 생생한 사실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에 해석 없이 서술함으로, 생생한 현장감과 생동감, 긴박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예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사용되지 않은 독창적인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두스(euthys)"라는 단어는 곧, 즉시, 당장이라는 의미로 문장에 생동감과, 긴박감을 더해주며, 다른 복음에서는 "이끌리다"로 유순하게 표현하였으나, 마가는 "몰아내다"라는 강하고 저돌적인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런 부분이 저자가 마르코복음을 선택한 이유인 것 같다. 강력하고, 활동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이 저자와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저자는 결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육신의 몸으로 인간의 사역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예수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그저 앉아서 명상이나 하고 개인의 득도와 해탈을 위해 노력하며, 깨달음을 설파하는 몽상가가 아니라. 직접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어 소외당한 민중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약자들의 대변인. 민중을 가르치고 돌보아준 실천가로 이야기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기존 보통의 보수 교단 소속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책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의 신성, 영적인 가르침이 아닌, 오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이 책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해방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예수가 몸소 보여준 것처럼 교회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교분리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정교분리 원칙' 이 나온 배경은 중세 시대에 교회가 스스로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어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타락한 역사 때문이다.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관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군사 파시즘 기간의 한국의 보수 개신교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유대 본토는 거의 약탈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세금 정책으로 인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방인(로마) 교회들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환난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다. 인권을 박탈당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고난 한 인생을 살다가 지배계급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치적 혁명가, 위대한 혁명가로 그리고 있다.

.p137(마가복음 8:27~34)
"예수에게 해방은 이스라엘의 해방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안에서 인권을 잃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삶이 변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사실 그런 관점은 계급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 오늘 세상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계급은 인민들로 하여금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 보지 못하게 하려,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뭉뚱그려 보게 하려 애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민족', '위대한 로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따위로, 그래야만 그 민족이나 국가 안에서 계급 간의 억압과 착취를 숨길 수 있다. 예수가 살던 세상엔 아예 계급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그런 관점을 자질 수 있었을까?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개념이 삶을 만든 게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 개념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걸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어설픈 인문주의자들에게 보듯 개념이 곧 지시하는 내용 자체인 양 오해하여, 그 개념이 다시 우리 삶의 내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념의 체제에서만 관념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있다면, 개념이 없이도 혹은 개념을 몰라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에 이미 충만할 수 있음을 예수는 보여 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며,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깨달으며, 예수가 소외된 민중에게 애끊어하며 친히 찾아가 구제하였듯이 우리도 주변 이웃에게 애끊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 사랑으로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막1:41) "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는 난생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병자는 누구보다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지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너무 반감을 갖지 않고 또 하나의 외서를 읽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듯하다. 예수에 대한 독특한 표현이나, 말씀하신 비유와 행한 사건과 이적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문화적 설명이 성경 이해를 쉽게 해주는 면도 있다. (초신자,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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