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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평점 :
임현의 소설집을 읽었다. 소설집의 제목이자 동명의 단편이기도 한 <그 개와 같은 말>을 포함해 총 1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엔 잘 모르는 작가여서, 괜히 내용이 난해하고 모호하진 않을까, 그래서 재미가 없진 않을까 의심 했다. <고두>란 소설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2017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 하나였단 게 기억이 났고, 그제서야 임현이란 작가에 신뢰가 생겼다. 이런 감정들, 그러니까 잘 모를 때는 대뜸 의심부터 하고, 나중에 그것이 이름 있는 물건이거나 값어치 있는 것으로 밝혀질 때 사람들은 신뢰와 즐거움 같은 감정들을 느낀다.
인간 관계도 이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상대를 잘 모르든 알든 '아마, 이렇지 않을까'하고 함부로 상대의 생각을 가늠하고, '아마, 이럴 거야.'라고 속으로 단정 지어버린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이 자신 입장에선 편하고,'정말 그래?'라고 물어보았을 때, 상대의 대답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또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괜히 묻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도, 상대도 그렇게 함부로 서로를 단정 짓다가, 묘하게 의견이 충돌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에도, 말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혹시 싸우게 되어 관계를 망치지나 않을까, 내가 나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 침묵 때문에 차츰 차츰, 그러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멀어지는 일을 자주 경험한다.
임현의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렇게 의심과 단정, 침묵의 과정을 거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말의 변비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다 보면 참 쓸쓸한 느낌이 든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 관계를 지금처럼 유지하고 싶어서, 망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라는 순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사실 다 이기적인 것이라고, <고두>의 주인공은 말한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p33
그래서 인물들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편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런 행동의 끝이 좋을 리 없다. 결국 인물들은 끝에 가서 모두 혼자가 되어 버린다. 아니면 <거기에 있어>의 은우처럼,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 하거나.
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불가능한 세계>에서 소진의 아버지와 소진, 소진과 남편 민재는 소통의 부재를 느낀다. 서로 자신의 맘대로 상대를 이상하다, 고 단정지어버려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소통을 시도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곁을 떠난 뒤일 때도 있다. <좋은 사람>의 '나'는 머뭇거리다가 우재를 놓쳤다. <무언가의 끝>과 <외>는 연결 된다. 이 두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다.
그 사람이 나를 봤어요.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그 사람도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거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p219 <외>
서로를 잘 보고 있었다고,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대는 사라지고 없다. 관계가 단절되고 혼자 남은 후에야 이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혼자 글을 쓰려고 시도하거나, 독자에게 말을 거는 식이다.
이봐? 묻잖아, 그래 당신. 당신한테 지금 내가 묻잖아. 어딜 봐? 그래, 너. 너, 이 새끼야. 너라고 너! 씨발, 다 너 때문이라고! 그래서 뭐? 뭘 더 원해? 문 뒤에 뭐가 있었느냐고? 문을 열기는 한 거냐고?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뭐라 생각하는데?(..)듣고 싶은 게 뭐야? 책장에서 가장 손을 많이 탄 한 권을 꺼내 마지막 장면을 펼쳐보면 거기에 뭐라 적혀 있는지, 무얼 읽어왔는지, 지금 바라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 될 그것. p88 <엿보는 손>
그런데 슬프게도, 작가는 결국 독자들도 이 속의 인물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엿보는 손>의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장 그간 가장 손때를 많이 탄 책을 펴서 거기 적혀 있는대로 자신을 판단해보라고 독촉하는 장면은, 사람이란 늘 자신이 오랫동안 겪어왔던 경험에 의거해서 상대를 단정짓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작가만의 생각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함부로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사는 것을.
그래서 이 소설이 부끄럽게도, 좌절스럽게도 읽힌다.
무슨 말이 그래?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착하다, 좋다, 그런 건 일종의 상태 아니냐? 그랬다가 안 그러기도 하는 거 아니냐? 그냥 너랑 나 같은 사람이잖아. 그 애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원래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죽으면 너는 뭐라고 말할 건데?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왜 다들 무책임하게 좋았다고만 해? 불쌍하니까, 씨발 존나 불쌍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거야, 뭐야? 그럼 좋은 사람 이외의 그 애는 다 어디로 가는데? 어떻게 좋은 게 그 애의 전부야? 왜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좋은 사람>
인간 관계를 맺을 때, 좀 더 상대에게 섬세하지 못했던, 함부로 생각하고 편할 대로 단정 지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하면 좀 더 사이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나쁜 사람은 되기 싫어서 그렇게 한 거였는데, 변비 걸린 말은 딱딱해지고, 소통을 막아서 나는 때론 혼자가 되기도 했고, 혼자가 될까봐 두려워 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경험이 거듭 환기되어 나는 한 편 한 편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깊은 슬픔에 빠지곤 했다.
임현의 소설은 질문을 한다기보다는 하게 한다. 답하려 애쓰다 보면 다시 점점 더 곤란한 질문들이 생겨난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임현의 소설은 읽으나 마나다.
띠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는데, 정말 맞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나는 결국 답을 하지 못한다. 그냥 힘들고 아프고 외롭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그 때마다 작가가 숨겨 놓은 소설적 장치들을 찾는 것이 참 흥미롭게 느껴지고,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소설집의 주제가 이해, 에 관한 것이라면 <가능한 세계>로 시작해서 <불가능한 세계>로 끝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임현의 소설은 주제의식도 좋지만, 인물 하나하나가 다 마음이 쓰여서 더 좋다. 읽어보면 아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묵직하게 가슴을 울려서 속이 다 아플 정도로, 마음이 쓰이고 아팠다. 김애란의 '비행운'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거기 나오는 인물들도 다 비참하고 연민이 느껴지잖나. 명작이라고 칭송 받는 그것만큼 좋았다.
나중에 임현의 소설이 나오면 또 찾아 읽고 싶다. 이건 서두에 말한 2017 젊은 작가상 수상작이라든지, 뭐 이런 감투와 상관 없이, 이 작가의 글이 참 좋기 때문이다. 정말 순수하게,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