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하나님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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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감상평 : 여러분, 이 책 진짜 재밌어요ㅠㅠ 보면서 소리 엄청 지름ㅠㅠ 끄앙! 으어워워워! 허어억!!!! 저는 진짜 재밌게 봤고, "도가니" "이끼" "곡성" 같은 영화 흥미롭게 보셨다면 아마 이 소설도 맘에 드실 것 같아요! 완전 추천!

총점: ★★★★☆





[심장 부여잡고 쓰는 멀쩡한 후기]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뭔가 불경한 느낌을 받았다. [나쁜 하나님]이라... 그간 읽었던 많은 텍스트 대부분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표기했다. 글 쓴 사람들이 기독교를 잘 몰랐거나, 일부러 '하느님'이라고 써서 혹시 있을 종교 마찰을 피해보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원규는 제목에 '하나님'이라고 씀으로써, 앞선 두 가지 이유를 모두 직선으로 깨부숴 버렸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으며, 그를 피하지 않겠다는 어떤 강하고, 범접하기 두려운 의지가 제목에서 뿜어져 나왔다.






작가 주원규의 이력도 흥미롭다. <열외인종잔혹사>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했고 장편소설<너머의 세상>, <천하무적 불량야구단>등 들으면 알만한 책들을 썼다. 최근엔 웰메이드라고 평가 받는 tvN 드라마 <아르곤>을 집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목사'라는 점이 내 눈길을 끌었다. 전업작가도 있지만 투잡을 뛰는 작가도 많다. 그런데 그중 다른 직업이 목사인 작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소설은 기독교를 주제로 하지 않았는가. 목사가 쓴 하나님이라... 그의 전작들로 미루어 보아 이 소설 역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아주 쎄게 가겠구나. 


지금은 무교이지만 중학교 시절까지 나는 교회를 다녔다. 모태 기독교 집안도, 특별한 신앙도 아니었다. 그냥 바쁜 부모님 대신 날 보육 할 곳이 교회밖에 없었다. 머리가 좀 크곤 발길을 끊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예수님의 희생을 슬퍼하는 사람들, 자신의 죄를 땅을 치고 울며 고백하는 죄인들의 모습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신을 믿진 않지만 신에 대적하는 행위는 어딘가 불편했다. 일반인인 나도 불경스럽게 느끼는 것을, 목사인 작가가 과연 어떻게 돌파한단 말인가. 게다가 제목인 <나쁜 하나님>과 달리 정작 죄를 짓는 건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주인공 '민규'의 처절한 분투는 그래서 더 그 죄를 씻고 신 앞에 바로 서려는 인간의 강한 의지로 읽힌다. 민규의 편에 함께하는 유재환 목사, 한영호 장로, 김정은까지. 이들이 선이라면 시의원 김인철은 철저한 거악(巨惡)이다. 김인철이 믿는 것은 악마. 민규가 믿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 고작 돌팔매 하나가 전부였던 어리고 약한, 그러나 용감한 다윗처럼 골리앗을 향해 돌진하는 민규의 사투를 숨죽여 따라나가던 그 때!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때!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충격에 빠트린다. 선은 악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했던가. 거악이 사라진 곳에서야 비로소 독자는,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자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 주원규는 '종교소설이란 멍에 아닌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은 소재만 종교일 뿐, 다루고 있는 메세지는 이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면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민규는 절규한다. 



"너희들의 하나님은 미쳤어. 악마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퇴장해버린 진짜 나쁜 하나님이라고!"


머릿속에 왕왕 울리는 이 절규를 아프게 곱씹어본다. 그리고 정작 내가 삶에서 내가 믿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내 입맛대로 함부로 재단해버린 무언가는 아닌지 자문해본다. 주원규는 똑똑하고 무섭다. 그는 기독교의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 <나쁜 하나님>이란 불경한 제목을 내걸고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독자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더 쎄고, 더 충격적이고, 더 찝찝하다. 올해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좋다. 주원규의 다른 소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조바심이 든다. 빨리 만나고 싶다. 그의 또 다른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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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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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리뷰▼>



어느 시인은 말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술은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나도 이제는 후줄근한 삶으로 터덜터덜 돌아가야 한다고.

서른은 더 이상 이십 대처럼 객기를 부리기도, 새로운 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나이다. 열정보다는 생존이 더 급하기 때문에 취업에 얻어맞고, 상사에게 무시 당해도 참고 참아야 한다. 


주인공 김지혜는 이름 만큼이나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서른 살 인턴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 살 때는 사람들과 함께 촛불 시위도 나가고 기성세대에 대해 반감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열정이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정규직을 목표로, 상사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고 더러운 꼴을 적당히 무시하는 보통의 서른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인턴으로 '규옥'이 새로 들어오면서 그녀의 삶은 조금씩 변화를 맞는다. 


"놀아보고 싶어요. 세상은 경직되어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거기다 세상에 좌절 당한 경험이 있는 남은과 무인까지 합세하면서, 지혜는 참고 참았던 자신의 억눌림도 표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 첫 시도로 규옥이 벽에 그라피티를 하는 것을 제안하자 지혜는 덜컥, 그러겠다고 대답해버린다.


억울하건 화가 나건, 사람들은 세상에 비일비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꾸역꾸역 잘도 잊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살아지지 않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그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고, 통용되는 것들에 대부분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자신 없게, 네, 라고 말해버리는. 그런 내가 규옥의 제안에 동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규옥에 대한 이끌림 때문은 아니었다.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자신 있게 외쳐보고 싶어서였을 거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p91


그들의 '반격'은 세상을 발칵 뒤집지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도 못한 채 단지 해프닝으로만 끝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주 소심한 반격이 조금씩 조금씩 지혜와, 규옥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소설은 그렇게 결말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아몬드>로 제 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손원평. 그녀가 이번엔 닳고 닳은 서른의 주인공을 내세운 <서른의 반격>으로 제 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반격은 되받아 공격한다는 뜻과 달리 오히려 찌질해서 더 웃음이 나고 현실적이다. 당선에서 매번 탈락하는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 고무인이나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서 끊임 없이 고민하는 주인공 김지혜는 작가의 자전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아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편의 잘 짜여진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겪는 고민이나 규옥이 하는 말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들게 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른의 반격>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세대의 어려움과 갈등을 최선의 방법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소설에 이어 또다시 멋진 작품을 만들어준 손원평 작가님에게 박수를!




손원평 작가님! <아몬드>도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서른의 반격>도 정말 짱짱 좋았다 >_< 뭔가 되게 장강명 작가님 느낌도 나면서 시크하고 도도한...아무튼 걸크러쉬 뿜뿜!!! ♥ 작가님,꽃길만 걸으세요♥







<내가 밑줄 친 문장>


(...)'의자의 마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권위와 힘을 가진 줄 착각하는 마법에 걸리게 되죠. 그리고 수없이 깔린 의자에 앉으면 힘없는 대중이 되어 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에 걸립니다. 의자는 의자일 뿐이라는 걸 다들 까먹어버린단 소리예요. p49



-드라마 김과장 남궁민, 드라마에서도 사이다 이미지더니 소설 속 규옥과 많이 닮았다^^-


궁금해서 살펴본 규옥의 이력서는 단순했다. 그는 J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그 밖에 이렇다 할 이력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턱걸이로 인서울 철학과라. 스무 살 때부터 백수 예약한 거나 다름없다. p46





(...)그런데 사실 난 가끔 궁금해요. 우리가 욕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 놓였을 때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판하는 건 쉬워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상식을 잣대 삼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순간에 놓이면 존엄성과 도덕, 상식을 지키는 건 소수의 몫이 돼요. 내가 그런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똑같이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마음에 기름이 끼면 끝이니까.

어떤 노력이요?

적어도 내 몫을 위해서만 싸우지는 않겠다고 자꾸자꾸 다짐하는 노력.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더 나은 어떤 것을 향해 차츰 다가가고 있다고만 바랄 뿐이죠. p81





근데, 참 신기해요. 박 교수한테 그러고 나니까 맘속의 체증이 하나 사라지는 거예요. 그냥 밖으로 크게 소리 한번 지른 것뿐인데. 적어도 내가 그 사람에게 내재된 부끄러움을 한 번쯤 되새겨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부터 생각이 많아졌어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만 해도 세상이 조금쯤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p82




지환과 규옥이 던진 정반대의 명제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지환은 현실을 영리하게 따르라고 강조했고 규옥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져보자고 했다. 정반대에 놓인 두 개념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마주하긴 괴롭다는 거였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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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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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의 소설집을 읽었다. 소설집의 제목이자 동명의 단편이기도 한 <그 개와 같은 말>을 포함해 총 1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엔 잘 모르는 작가여서, 괜히 내용이 난해하고 모호하진 않을까, 그래서 재미가 없진 않을까 의심 했다. <고두>란 소설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2017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 하나였단 게 기억이 났고, 그제서야 임현이란 작가에 신뢰가 생겼다. 이런 감정들, 그러니까 잘 모를 때는 대뜸 의심부터 하고, 나중에 그것이 이름 있는 물건이거나 값어치 있는 것으로 밝혀질 때 사람들은 신뢰와 즐거움 같은 감정들을 느낀다.





인간 관계도 이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상대를 잘 모르든 알든 '아마, 이렇지 않을까'하고 함부로 상대의 생각을 가늠하고, '아마, 이럴 거야.'라고 속으로 단정 지어버린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이 자신 입장에선 편하고,'정말 그래?'라고 물어보았을 때, 상대의 대답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또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괜히 묻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도, 상대도 그렇게 함부로 서로를 단정 짓다가, 묘하게 의견이 충돌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에도, 말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혹시 싸우게 되어 관계를 망치지나 않을까, 내가 나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 침묵 때문에 차츰 차츰, 그러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멀어지는 일을 자주 경험한다.





임현의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렇게 의심과 단정, 침묵의 과정을 거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말의 변비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다 보면 참 쓸쓸한 느낌이 든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 관계를 지금처럼 유지하고 싶어서, 망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라는 순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사실 다 이기적인 것이라고, <고두>의 주인공은 말한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p33





그래서 인물들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편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런 행동의 끝이 좋을 리 없다. 결국 인물들은 끝에 가서 모두 혼자가 되어 버린다. 아니면 <거기에 있어>의 은우처럼,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 하거나. 





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불가능한 세계>에서 소진의 아버지와 소진, 소진과 남편 민재는 소통의 부재를 느낀다. 서로 자신의 맘대로 상대를 이상하다, 고 단정지어버려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소통을 시도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곁을 떠난 뒤일 때도 있다. <좋은 사람>의 '나'는 머뭇거리다가 우재를 놓쳤다. <무언가의 끝>과 <외>는 연결 된다. 이 두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다.






그 사람이 나를 봤어요.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그 사람도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거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p219 <외>





서로를 잘 보고 있었다고,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대는 사라지고 없다. 관계가 단절되고 혼자 남은 후에야 이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혼자 글을 쓰려고 시도하거나, 독자에게 말을 거는 식이다.





이봐? 묻잖아, 그래 당신. 당신한테 지금 내가 묻잖아. 어딜 봐? 그래, 너. 너, 이 새끼야. 너라고 너! 씨발, 다 너 때문이라고! 그래서 뭐? 뭘 더 원해? 문 뒤에 뭐가 있었느냐고? 문을 열기는 한 거냐고?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뭐라 생각하는데?(..)듣고 싶은 게 뭐야? 책장에서 가장 손을 많이 탄 한 권을 꺼내 마지막 장면을 펼쳐보면 거기에 뭐라 적혀 있는지, 무얼 읽어왔는지, 지금 바라는 게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 될 그것. p88 <엿보는 손>





그런데 슬프게도, 작가는 결국 독자들도 이 속의 인물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엿보는 손>의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장 그간 가장 손때를 많이 탄 책을 펴서 거기 적혀 있는대로 자신을 판단해보라고 독촉하는 장면은, 사람이란 늘 자신이 오랫동안 겪어왔던 경험에 의거해서 상대를 단정짓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작가만의 생각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함부로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사는 것을.






그래서 이 소설이 부끄럽게도, 좌절스럽게도 읽힌다. 







무슨 말이 그래?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착하다, 좋다, 그런 건 일종의 상태 아니냐? 그랬다가 안 그러기도 하는 거 아니냐? 그냥 너랑 나 같은 사람이잖아. 그 애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원래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죽으면 너는 뭐라고 말할 건데?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왜 다들 무책임하게 좋았다고만 해? 불쌍하니까, 씨발 존나 불쌍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거야, 뭐야? 그럼 좋은 사람 이외의 그 애는 다 어디로 가는데? 어떻게 좋은 게 그 애의 전부야? 왜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좋은 사람>





 인간 관계를 맺을 때, 좀 더 상대에게 섬세하지 못했던, 함부로 생각하고 편할 대로 단정 지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하면 좀 더 사이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나쁜 사람은 되기 싫어서 그렇게 한 거였는데, 변비 걸린 말은 딱딱해지고, 소통을 막아서 나는 때론 혼자가 되기도 했고, 혼자가 될까봐 두려워 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경험이 거듭 환기되어 나는 한 편 한 편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깊은 슬픔에 빠지곤 했다. 



임현의 소설은 질문을 한다기보다는 하게 한다. 답하려 애쓰다 보면 다시 점점 더 곤란한 질문들이 생겨난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임현의 소설은 읽으나 마나다. 


띠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는데, 정말 맞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나는 결국 답을 하지 못한다. 그냥 힘들고 아프고 외롭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그 때마다 작가가 숨겨 놓은 소설적 장치들을 찾는 것이 참 흥미롭게 느껴지고,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소설집의 주제가 이해, 에 관한 것이라면 <가능한 세계>로 시작해서 <불가능한 세계>로 끝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임현의 소설은 주제의식도 좋지만, 인물 하나하나가 다 마음이 쓰여서 더 좋다. 읽어보면 아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묵직하게 가슴을 울려서 속이 다 아플 정도로, 마음이 쓰이고 아팠다. 김애란의 '비행운'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거기 나오는 인물들도 다 비참하고 연민이 느껴지잖나. 명작이라고 칭송 받는 그것만큼 좋았다. 


나중에 임현의 소설이 나오면 또 찾아 읽고 싶다. 이건 서두에 말한 2017 젊은 작가상 수상작이라든지, 뭐 이런 감투와 상관 없이, 이 작가의 글이 참 좋기 때문이다. 정말 순수하게,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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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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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 맞춤법을 지적하는 댓글이 주루룩 달리고, 생계형 범죄 기사에는 안타까운 시선 대신 범죄자를 무참히 조롱하는 말들이 쏟아진다.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고 청년이 지하철 무임승차 하는 노인을 미워한다. 그런 잔인한 사회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눈에 띄었나 보다. '공감'이라는 단 두 글자에 마음이 울컥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계의 시작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감이란 능력이 왜 점점 줄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고 싶었다.


바로 말하자면 이 책은 공감 능력을 길러주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공감 능력이 인간에게 처음부터 있다는 것을 계속 상기시켜 준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특히 유인원에게도 공감 능력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은연 중에 동물을 하등하게 보고, 인간만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멀리 팔려간 개가 몇 날 며칠을 달려 주인집에 되돌아 온 것을 기특하게 여기는 건 그 개가 정말 기특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 개에게도 있다고 오해해서 신기해하는 것이다. 자만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인간 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만물의 제왕이란 착각을 버리게 해준다. 네덜란드 태생의 동물 행동학자이자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이 쓰고 생물학 박사 최재천 교수가 번역했으니 그런 겸허함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동물이 참 신통방통하다! 가 아니라 그래, 인간도 동물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있지. 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합리적인 다양한 실험들을 예시로 많이 제시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친숙하게 느낄 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리고 곳곳에 위트가 살아 있다. 특히 하품 이야기가 그랬다. 하품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글만 읽어도 하품이 나올 수가 있다. 혹시 하품이?^^


동물 이야기가 많이 나와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차가운 인간들에게 너무 많이 지쳤나보다.

지식과 힐링,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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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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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최근 개봉한 '덩케르크' 등 많은 전쟁 영화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곤 한다. 그것들은 주로 생사를 가르는 치열한 전투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생존 본능, 적군과 아군 사이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 악전고투 속에서 끝내 이기고야 마는 승리의 이야기들이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모두 '과거'의 것들로, 군인들은 열악하고 골동품 같은 무기들 때문에 애를 먹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 등을 볼 때, 마치 고대 유물을 감상할 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처연하고, 비극적이지만 지금과 동떨어진 낯선 느낌을 말이다. 그리곤 그 때 이미 존재했던 미군의 원자폭탄과, 독일군의 잠수함 등의 발명품들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군인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오길 소망 하는 과학자들이 만든 발명품들을 말이다.




메리 로치의 '전쟁에서 살아남기'는 그런 과학자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국의 국민과 적은 물론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까지 살상 무기를 만든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곤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적을 죽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군인들이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이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던 과학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메리 로치가 따라간다.




워싱턴 포스트가 <미국에서 가장 유쾌한 과학 저술가>라고 칭송한 것 답게 이 책에서 작가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과학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군사 과학이 단지 전략과 무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과학자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취재하는 방식으로 밝게 풀어 나간다. 



원래 제목이었던 'Grunt(사람이 아플 때 끙! 하고 앓는 소리)'도 작가의 이런 유쾌한 성격을 잘 드러낸다. 국내로 들어오면서 독자들이 좀 더 알기 쉽게 바뀌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냉철하고 이성적인 과학자들에 대해 '짠'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체를 하도 봐서 이제는 무뎌져 버린 과학자들의 생기 없는 표정과, 자신의 연구가 부디 한 사람의 목숨을 지킬 수 있길 기원하는 모습이 한순간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엄청난 폭발음에서 청력을 보호하는 귀마개, 냄새 폭탄, 국가 안보 위협 요소로서의 설사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읽을 땐 참 흥미롭고 신기하다가도 이런 것들을 써야만 하는 군인들에게는 경외심과 안타까움이 들게 한다. 세계 유일의 휴전 국가에 살고 있지만 그 위험성을 잘 못 느꼈던 내게 지금 이 시간에도 이라크에서 총알과 싸우는 군인들의 이야기는 생생한 비극으로 다가온다.



특히 마지막 14장인 '사자로부터의 피드백'에선 이 책을 끝까지 경쾌하게 끌고 가려던 메리 로치의 일말의 슬픔을 느낄 수가 있다. 젊은 청춘들의 시신이 연구 대상이 되어서 또 다른 청춘들의 보호막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장면은 '전쟁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메리 로치의 마지막 말이 이 답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천 개의 불빛(a thousnd ponit of light)"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뒤로 물러나서 전체를 볼 때에만, 그런 뒤에야 비로소 그중 어느 한 불빛의 가치를, 그것을 꺼뜨리는 행위의 정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전체를 조망하기란 힘겹다. 사다리를 얼마나 높이 올라가야 할지 상상하기가 버겁다."


아마 이 책을 읽는다면, 처음에는 흥미로운 군사 과학 때문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다가도

끝에 가선 눈가가 촉촉해 지는 경험을 할 지 모른다. 휴지 준비. 박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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