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책과 작가를 혼동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 작가의 흔적이랄까 고민이랄까 어떻게든 작가의 성향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어른 손바닥 크기만한 아담한 사이즈의 책을 단숨에 읽어내렸다. 그간 좀체 보지 못했던 구성과 문장이 독특해서 잠시 멈췄다가도 다시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숨가쁘게 치달아가면서 든 생각 중에 작가에 대한 것이 있었다. 날카롭고 냉담하게 세상을 꿰뚫을 줄 아는 사람, 속에 차디찬 조소가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러면서도 재기발랄할 것 같은 사람.
그리 생각한 이유는 첫째, 소설의 구성 때문이었고 둘째, 인물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소설은 처음부터 연극의 문법을 차용한다.
(관객을 위한 의자나 배우를 위한 무대 없이 오직 빛의 밝기로만 경계를 만드는 원형 극장 안에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곳곳에 서 있다. 어두웠던 한 곳에 빛이 들어오자 웅성웅성 대던 목소리들이 사그라진다.)p.6
그리고 동시에 이전의 소설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장식 묘사가 뒤를 잇고 주인공이 등장한다. 갑작스런 연극 지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익숙한 소설 형식이 나오자 독자는 곧바로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이름은 있겠으나 편의상 M으로 불리는 주인공은 마흔 아홉 번째, 아니 마흔 여덟 번째 면접을 보기 위해 회사로 간다. 면접에서 이루어지는 인물의 대화는 ( )지문과 대사로 처리 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독자인 동시에 관객의 입장이 되어 M의 행적을 뒤쫓게 된다. 그런데 읽는 이가 따라가는 M의 면접은 좀처럼 순조롭지가 않다.
회사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대뜸 다가와 M을 대신 면접하는 바람에 M의 진짜 면접 기회가 날아가버리거나 또다른 면접에선 앉을 자리가 부족해 구직자인 M이 대신 의자를 찾으러 나가기도 했다. 생애 첫 면접이었던 대입 면접에선 마치 합격할 것처럼 띄워주더니 실제론 불합격을 받는 억울한 일을 겪었고, 이제 보는 마흔 여덟 번째 과자 회사 면접에선 방금 한 말도 손바닥 뒤집듯 바꿔서 대답하는 얼토당토 않은 상황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건상관 없다. 오늘 보는 이 면접은 M이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취직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입사 지원서를 낼 수 있는 세상은 M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몇십 년 전에 이미 끝나 버렸다. 지금은 아무리 과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과자 회사가 사원 모집 공고를 낸 이상 거기에 지원하는 것이 의무가 된 세상이다. p24
M은 대학 입시 면접에서 믿을 수 없게 떨어진 것처럼, 이번 과자 회사 면접을 믿을 수 없는 이유로 합격한다. 지금껏 읽는 이가 따라간 M의 발자취에서 납득이 가거나 신뢰가 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세상은 요지경이란 걸, 그래서 사는 재미는커녕 혼란만 가득하단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M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이게 면접이기 때문이다.
삶은 거대한 기업이고 인간은 발에 채이는 수많은 구직자들 중 한 명일 뿐,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은 자연인만 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이 기업에서 떨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도태, 그러니까 불합격 말이다. 그래서 M은 죄를 지어도 기업에 합격하는 쪽을 선택한다. 드디어 거짓으로 점철 된 면접을 끝내고 M은 고대하던 기업의 신입사원이 된다.
라고 생각했는데 또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신입사원 연수(뚜둥)!
이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된다. M은 연수원 제 방에 누워 옛날에 새를 봤던 일을 생각한다.
왜 다 큰 어른들 여럿이 창틀 뒤에 숨어 낄낄대며 새를 구경하는 걸까. 왜 새가 투명한 창에 몸을 부딪힐 때마다 오오, 하고 연민과 환호가 섞인 탄성을 내지르는 걸까. 좁은 베란다에 갇혀서 허둥지둥하는 작은 생물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방향을 틀기만 하면 뒤쪽 베란다로도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작은 머리가 우습나. 새의 전부인 날개가 꼼짝없이 무용지물이 된 모습이. p51
연수원에 제 발로 들어가 누워 있는 M은, 실은 그래서 더 큰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베란다에 갇히고 만 새처럼 보인다. 아니, 아니다. 책의 첫 장에서 보았듯 M은 거대한 연극 무대 위의 연기자일 뿐이다. 다만, 그 사실을 M도 우리도 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연수원에서 M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조원들은 모두 집 짓기 봉사를 해야 한다. 모두가 이 일을 수해로 부서진 집을 재건축 해주는 일로 알고 있지만 실은 회사가 나중에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 미리 봉사라는 연막작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언젠가 다시 부숴야만 하는 집을 M과 조원들이 짓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요지경, 아니 믿을 수 없게 부조리한 요지경이다.
이 사실을 편의상 '친구'라고 부르는 이에게 전해 들은 M은 자꾸만 이 진실이 신경 쓰인다. 벽돌을 나르다가도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노인들의 표정이 눈에 밟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M은 이 봉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 신입사원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M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벽돌을 나르고 죽을 힘을 다해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 낙타의 바늘구멍에 모가지라도 들이밀겠다는 M의 의지는 처음에 순한 양처럼 생각했더 '꼬마'를 비웃고, 같은 조원인 '떠버리'를 경계하고 '친구'를 배신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는다.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봉사에 매달리는 M은 그러나 무슨 일에선지 거듭해서 X를 받고, 이 무한경쟁과 자꾸만 들려오는 기묘한 새소리, 모른 척 할 수 없는 진실에 결국 M은...(책에서 확인하시라!)
돌연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관객에게 다가와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답을 구하는 M의 모습은, 순식간에 관객과 연기자의 경계를 흐트려놓는다. 관객은 또다른 연기자로 무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내가 하기 싫은 것도 살기 위해 해야 하고, 거짓인 것도 진실이라 포장하고 살아야 한다. 계속 자신을 팔아 넘기는 세일즈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인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고,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경계 밖을 나가는 걸 허락받지 않은 새의 삶이다. 이름과 진심 대신 익명과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아가는 것이다. 남의 삶이 아니라 그게 바로 내 삶이다. 이제 M이 사라진 연극 무대 위엔 한동안 웅성웅성 거리는 혼란함만 남다가, 다시 곧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새로운 면접자가 연기를 하러 들어설 테니 말이다.
통렬한 풍자와 섬뜩한 묘사가 돋보이는 박지리의 소설 <3차 면접에서 돌발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부조리를 전혀 식상하거나 익숙하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아주 낯설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정말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렇게 섬뜩한 소설을 써내는 작가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하여 기사를 찾아봤더니 뜻하지 않은 부고소식에 잠시 머리가 멍했다. 그의 글을 편집한 편집자는 작가의 부고가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낮게 평가하는 이유도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그의 글을, 그러니까 미루고 미뤄서 아주 나중에야 봤을 지 모를 그의 글을 당장 내일이라도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찾아봐야 겠다 결심한 까닭은 그의 부고가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요소가 되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다시는 그의 글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박지리 작가의 글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 일단 이 책이 나의 손에 있다는 것도 정말 기쁘다. 빨리 그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 <다윈 영의 악의 기원>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