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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본격 리뷰▼>
어느 시인은 말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술은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나도 이제는 후줄근한 삶으로 터덜터덜 돌아가야 한다고.
서른은 더 이상 이십 대처럼 객기를 부리기도, 새로운 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나이다. 열정보다는 생존이 더 급하기 때문에 취업에 얻어맞고, 상사에게 무시 당해도 참고 참아야 한다.
주인공 김지혜는 이름 만큼이나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서른 살 인턴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 살 때는 사람들과 함께 촛불 시위도 나가고 기성세대에 대해 반감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열정이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정규직을 목표로, 상사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고 더러운 꼴을 적당히 무시하는 보통의 서른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인턴으로 '규옥'이 새로 들어오면서 그녀의 삶은 조금씩 변화를 맞는다.
"놀아보고 싶어요. 세상은 경직되어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거기다 세상에 좌절 당한 경험이 있는 남은과 무인까지 합세하면서, 지혜는 참고 참았던 자신의 억눌림도 표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 첫 시도로 규옥이 벽에 그라피티를 하는 것을 제안하자 지혜는 덜컥, 그러겠다고 대답해버린다.
억울하건 화가 나건, 사람들은 세상에 비일비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꾸역꾸역 잘도 잊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살아지지 않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그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고, 통용되는 것들에 대부분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자신 없게, 네, 라고 말해버리는. 그런 내가 규옥의 제안에 동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규옥에 대한 이끌림 때문은 아니었다.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자신 있게 외쳐보고 싶어서였을 거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p91
그들의 '반격'은 세상을 발칵 뒤집지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도 못한 채 단지 해프닝으로만 끝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주 소심한 반격이 조금씩 조금씩 지혜와, 규옥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소설은 그렇게 결말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아몬드>로 제 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손원평. 그녀가 이번엔 닳고 닳은 서른의 주인공을 내세운 <서른의 반격>으로 제 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반격은 되받아 공격한다는 뜻과 달리 오히려 찌질해서 더 웃음이 나고 현실적이다. 당선에서 매번 탈락하는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 고무인이나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서 끊임 없이 고민하는 주인공 김지혜는 작가의 자전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아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편의 잘 짜여진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겪는 고민이나 규옥이 하는 말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들게 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른의 반격>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세대의 어려움과 갈등을 최선의 방법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소설에 이어 또다시 멋진 작품을 만들어준 손원평 작가님에게 박수를!
손원평 작가님! <아몬드>도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서른의 반격>도 정말 짱짱 좋았다 >_< 뭔가 되게 장강명 작가님 느낌도 나면서 시크하고 도도한...아무튼 걸크러쉬 뿜뿜!!! ♥ 작가님,꽃길만 걸으세요♥
<내가 밑줄 친 문장>
(...)'의자의 마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권위와 힘을 가진 줄 착각하는 마법에 걸리게 되죠. 그리고 수없이 깔린 의자에 앉으면 힘없는 대중이 되어 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에 걸립니다. 의자는 의자일 뿐이라는 걸 다들 까먹어버린단 소리예요. p49
-드라마 김과장 남궁민, 드라마에서도 사이다 이미지더니 소설 속 규옥과 많이 닮았다^^-
궁금해서 살펴본 규옥의 이력서는 단순했다. 그는 J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그 밖에 이렇다 할 이력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턱걸이로 인서울 철학과라. 스무 살 때부터 백수 예약한 거나 다름없다. p46
(...)그런데 사실 난 가끔 궁금해요. 우리가 욕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 놓였을 때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판하는 건 쉬워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상식을 잣대 삼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순간에 놓이면 존엄성과 도덕, 상식을 지키는 건 소수의 몫이 돼요. 내가 그런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똑같이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마음에 기름이 끼면 끝이니까.
어떤 노력이요?
적어도 내 몫을 위해서만 싸우지는 않겠다고 자꾸자꾸 다짐하는 노력.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더 나은 어떤 것을 향해 차츰 다가가고 있다고만 바랄 뿐이죠. p81
근데, 참 신기해요. 박 교수한테 그러고 나니까 맘속의 체증이 하나 사라지는 거예요. 그냥 밖으로 크게 소리 한번 지른 것뿐인데. 적어도 내가 그 사람에게 내재된 부끄러움을 한 번쯤 되새겨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부터 생각이 많아졌어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만 해도 세상이 조금쯤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p82
지환과 규옥이 던진 정반대의 명제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지환은 현실을 영리하게 따르라고 강조했고 규옥은 현실에 균열을 일으킬 용기를 가져보자고 했다. 정반대에 놓인 두 개념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마주하긴 괴롭다는 거였다.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