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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게을러 터진 탓에 읽은 지 일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리뷰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낮에는 장강명 작가가 출연한 팟빵(?)라디오를 들으면서 늘어지게 누워 있었다. 김관 기자와 가수 요조가 DJ로 나오는 라디오였고, '이게 뭐길래'라는 코너였다. BGM이 '이게 뭐길래~이게 뭐길래~' 하여튼 독특했다.
장강명 작가는 팬이 많은 작가다. 알고 있었지만 DJ들이 상기시켜주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만 알고 싶던 보물을 들킨 것(뺏긴 것)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아이돌 팬들이 최애(最愛)에게 갖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코너에서 소개한 책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는데, 분량이 두꺼워 겁을 먹었다는 DJ들의 청승에 공감이 가서 같이 웃었다. 블로그에 이 책을 리뷰 했는데 차마 손과 머리가 그 방대한 대작을 못 따라가서 글이 좀 엉성하게 되어버렸(지만 링크는 걸어둔)다. 가슴으로 느낀 바를 어찌 활자로 옮길 수 있으랴, 변명해본다.
오늘 리뷰할 책은 장강명의 연작소설 '뤼미에르 피플'이다. 일전에 읽었던 '댓글부대'의 주인공들을 이 '뤼미에르 피플'에서 따왔다고 해서 이 책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연작소설은 같은 듯 다른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져 있기 때문에 한 호흡으로 가는 여타 소설들과 비교해서 조금 부담이 된다. 그래서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어쩌겠는가, 역시 장강명인 것을.
이 소설은 신촌에 위치한 뤼미에르 빌딩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같은 층에 살고 있는데 하나같이 기묘한 인물들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이들만 이 곳에 사는 지, 건물주는 자기 재산에 별 관심이 없는 걸까, 싶을 만큼.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인물 군으로 나뉜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반인반수(半人半獸) 그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에(그럼 재미가 없으니까) 뭉뚱그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암울하다.' 어딘가 비틀어지고 무엇인가 결핍된 이들이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는 느낌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 남은 802호의 워커홀릭 남자는 어느 날, 사지가 마비되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후에야 인생의 파노라마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현실에 충실한 나머지 타락해버린 803호 여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죽은 804호 작가의 유작 속 여자는 실은 그 죽은 작가와 자고 싶어서 여동생을 질투한 이였고, 805호의 빚쟁이 가장은 빚을 갚기 위해 동명이인의 재벌에게 돈 다발로 폭행을 당한다.
마지막에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아내와 딸을 토닥이며 '고기 사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가장의 모습에서 그가 느꼈을 굴욕감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어이가 없네?')
이 외에도 애완고양이를 비정하게 버리는 805호 여자나 살인을 할 것이라 예상되는 809호 아이 등 이 소설 속 인간들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어둡고 비인(非人)적이다. 사람의 절반을 갈라 회색의 단면 만을 보여주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적인 결말의 끝에는 무거운 허무감만이 남는다. 내가 이 소설을 멈추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 호흡으로 끌고 가기에는 읽는 사람이 심해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반면 여기 나오는 동물들, 박쥐와 모기, 매미, 고양이, 쥐 등은 그 암울함에 연장 선상에 있지만 인간들의 어두운 모습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807호 에피소드는 강렬하다. 주인에게 버려진 애완고양이가 피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신을 버린 주인을 노려보는 장면. 우리가 소름이 돋아야 하는 것은 그 고양이의 벌건 눈이 아니라 그를 버린 인간의 비정함이다.
이렇게 추악한 인간들에게 제발 인간다워지기를, 인간답게 살기를 호소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바로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이다.
도대체 왜들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 몰라요?
(p.242)
쥐들은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생존하는데 대부분 그 먹잇감은 타락한 인간들이다. 사람 답게 살라는 쥐들의 경고가 섬뜩하다. 한편, 그 살인의 광경을 목격하고 도망치는 반인반서(半人半鼠) 소녀는 과연 인간 답게 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소설은 이렇게 우울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반인반수의 설정도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비둘기 떼의 방향을 조종하는 등 기묘한 행적을 보이는 803호 재동과 대자연의 흐름을 읽고 노래할 수 있는 810호 당주들이 그러하다. 이렇게 환상적인 에피소드들은 비현실적인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더욱 현실과 유리된다.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함이 시공간을 초월한 에피소드들을 통하면서 더욱 진해지는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맞다면 교통사고는 전부터 예정된 운명인 바, 두 남녀의 사랑은 사주팔자 앞에 덧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다면 교통사고는 완전히 무작위로, 아무 맥락없이 발생한 사건이며, 그런 독립적인 확률 앞에 두 남녀가 서로 얼마나 아끼고 위하는가 하는 문제는 무의미한 배경이다. 그런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뿐이리라.
(p.112~113)
인간의 어떠한 의지나 행동은 거대한 운명의 한 끗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허무함이 이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인 것이다. 이토록 끝없는 허무감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읽는 사람은 거기에서 의미를 건져낼 수도 있겠죠. 그건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사람은 벽지 무늬나 하늘의 구름, 얼룩을 보고도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벽지나 구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p.122
우리가 삶을 그렇게 거대하고 버겁게 여기는 이유는 끊임 없이 그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낮 없이 파고 팠던 구덩이가 품고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단지 흙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끝에 오는 그 허무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충실해야 하는 것은 현재이고, 갖춰야 하는 것은 오직 '인간다움' 뿐이라는 그 자명한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책, 바로 '뤼미에르 피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