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뤼미에르 피플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게을러 터진 탓에 읽은 지 일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리뷰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낮에는 장강명 작가가 출연한 팟빵(?)라디오를 들으면서 늘어지게 누워 있었다. 김관 기자와 가수 요조가 DJ로 나오는 라디오였고, '이게 뭐길래'라는 코너였다. BGM이 '이게 뭐길래~이게 뭐길래~' 하여튼 독특했다. 


장강명 작가는 팬이 많은 작가다. 알고 있었지만 DJ들이 상기시켜주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만 알고 싶던 보물을 들킨 것(뺏긴 것)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아이돌 팬들이 최애(最愛)에게 갖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코너에서 소개한 책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는데, 분량이 두꺼워 겁을 먹었다는 DJ들의 청승에 공감이 가서 같이 웃었다. 블로그에 이 책을 리뷰 했는데 차마 손과 머리가 그 방대한 대작을 못 따라가서 글이 좀 엉성하게 되어버렸(지만 링크는 걸어둔)다. 가슴으로 느낀 바를 어찌 활자로 옮길 수 있으랴, 변명해본다.



오늘 리뷰할 책은 장강명의 연작소설 '뤼미에르 피플'이다. 일전에 읽었던 '댓글부대'의 주인공들을 이 '뤼미에르 피플'에서 따왔다고 해서 이 책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연작소설은 같은 듯 다른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져 있기 때문에 한 호흡으로 가는 여타 소설들과 비교해서 조금 부담이 된다. 그래서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어쩌겠는가, 역시 장강명인 것을.


이 소설은 신촌에 위치한 뤼미에르 빌딩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같은 층에 살고 있는데 하나같이 기묘한 인물들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이들만 이 곳에 사는 지, 건물주는 자기 재산에 별 관심이 없는 걸까, 싶을 만큼.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인물 군으로 나뉜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반인반수(半人半獸) 그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에(그럼 재미가 없으니까) 뭉뚱그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암울하다.' 어딘가 비틀어지고 무엇인가 결핍된 이들이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는 느낌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 남은 802호의 워커홀릭 남자는 어느 날, 사지가 마비되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후에야 인생의 파노라마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현실에 충실한 나머지 타락해버린 803호 여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죽은 804호 작가의 유작 속 여자는 실은 그 죽은 작가와 자고 싶어서 여동생을 질투한 이였고, 805호의 빚쟁이 가장은 빚을 갚기 위해 동명이인의 재벌에게 돈 다발로 폭행을 당한다. 


마지막에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아내와 딸을 토닥이며 '고기 사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가장의 모습에서 그가 느꼈을 굴욕감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어이가 없네?')

이 외에도 애완고양이를 비정하게 버리는 805호 여자나 살인을 할 것이라 예상되는 809호 아이 등 이 소설 속 인간들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어둡고 비인(非人)적이다. 사람의 절반을 갈라 회색의 단면 만을 보여주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적인 결말의 끝에는 무거운 허무감만이 남는다. 내가 이 소설을 멈추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 호흡으로 끌고 가기에는 읽는 사람이 심해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반면 여기 나오는 동물들, 박쥐와 모기, 매미, 고양이, 쥐 등은 그 암울함에 연장 선상에 있지만 인간들의 어두운 모습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807호 에피소드는 강렬하다. 주인에게 버려진 애완고양이가 피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신을 버린 주인을 노려보는 장면. 우리가 소름이 돋아야 하는 것은 그 고양이의 벌건 눈이 아니라 그를 버린 인간의 비정함이다. 


이렇게 추악한 인간들에게 제발 인간다워지기를, 인간답게 살기를 호소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바로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이다.


도대체 왜들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 몰라요? 

(p.242)

쥐들은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생존하는데 대부분 그 먹잇감은 타락한 인간들이다. 사람 답게 살라는 쥐들의 경고가 섬뜩하다. 한편, 그 살인의 광경을 목격하고 도망치는 반인반서(半人半鼠) 소녀는 과연 인간 답게 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소설은 이렇게 우울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반인반수의 설정도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비둘기 떼의 방향을 조종하는 등 기묘한 행적을 보이는 803호 재동과 대자연의 흐름을 읽고 노래할 수 있는 810호 당주들이 그러하다. 이렇게 환상적인 에피소드들은 비현실적인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더욱 현실과 유리된다.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함이 시공간을 초월한 에피소드들을 통하면서 더욱 진해지는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맞다면 교통사고는 전부터 예정된 운명인 바, 두 남녀의 사랑은 사주팔자 앞에 덧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다면 교통사고는 완전히 무작위로, 아무 맥락없이 발생한 사건이며, 그런 독립적인 확률 앞에 두 남녀가 서로 얼마나 아끼고 위하는가 하는 문제는 무의미한 배경이다. 그런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뿐이리라.

(p.112~113)

인간의 어떠한 의지나 행동은 거대한 운명의 한 끗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허무함이 이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인 것이다. 이토록 끝없는 허무감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읽는 사람은 거기에서 의미를 건져낼 수도 있겠죠. 그건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사람은 벽지 무늬나 하늘의 구름, 얼룩을 보고도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벽지나 구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p.122



우리가 삶을 그렇게 거대하고 버겁게 여기는 이유는 끊임 없이 그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낮 없이 파고 팠던 구덩이가 품고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단지 흙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끝에 오는 그 허무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충실해야 하는 것은 현재이고, 갖춰야 하는 것은 오직 '인간다움' 뿐이라는 그 자명한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책, 바로 '뤼미에르 피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의 책들 중 이제 남은 건 '뤼미에르 피플', '다행히 졸업', '표백' 그리고 '열광 금지, 에바로드'. '뤼미에르 피플'은 연작소설이라 약간 망설여지고, '다행히 졸업'은 장강명 외에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하므로 살짝 뒤로 미루고, '표백'은 몇 해 전에 이미 읽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열광 금지 에바로드' 뿐. 

'에바로드'가 일본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따왔다는 것은 책 소개를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막 SF의 맛을 알았는데 또 그런 류를 읽는다는 것은 조금 물리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애니메이션이라니,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늑대아이' 등을 겨우 본 사람이다. 특히 '늑대아이'를 풀로 봐야 했을 때는 거의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아,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편식주의자인가.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이 소설을 읽기가 조금 꺼려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명 '믿보작(믿고 보는 작가)' '장강명'의 이름에  '제 2회 수림문학상 수상'이라는 인증을 믿고 가기로 했다. 설사 너무나 난해한 애니메이션 내용이더라도 아무렴 어떠냐, 장강명인데? 싶은 심정이었다.

'평전'이라는 형식을 빌려온 이 소설의 서술자는 뜻밖에도 '기자'다. 옛날에는 에반게리온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뭐 다 옛날얘기인 듯 싶은 그런 평범한 기자. 그가 인터뷰하는 '오덕'이 주인공이다. 그럼 이 '오덕'이 과연 어떻게 생겼냐, 하면

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많고, 돼지 같은 체형에다 '하,하,하;따위의 어색한 웃음을 남발하면서 오덕 용어를 쓰고, 상대의 어리둥절해 하는 반응에 곧바로 풀이 죽는 스타일 말이다.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은 당연히 없고, 친한 친구도 없으며, 사교성은 빵점에(후략)
p.12

이만 줄이자.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덕의 이미지에 딱 들어 맞을 테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인터뷰이 '박종현'은


























이렇게 생겼다.

안여돼이기는커녕, 굉장히 잘새긴 청년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색기가 줄줄 흐르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호감형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는지?
(p.13)

서술자의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이 당황스러움과 얼떨떨함이란! 나는 왠지 저 묘사대로 서강준을 닮았을 것만 같은 박종현을 상상하며 소설을 읽었다. 이 리뷰에서 박종현의 외모가 중요한 이유는 그게 우리가 갖는 오덕의 편견을 깨는 첫 번째 일이기 때문이다. 혹 저렇게 우월하게 생기진 않더라도 오덕은 외모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어떤 전문가가 말하길 앞으로는 '오덕'이 살아남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방문 꼭 닫고 자기만의 세계에 열중하는 그런 사람 말고 무언가 한가지라도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잘하는 사람 말이다.(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분 탓?)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경쟁력을 갖고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까진 아니다. 

그냥 곧 서른을 앞둔 만 29세의 청년이 청소년 때 좋아하던 '에반게리온'의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한중일을 돌아다니며 스탬프를 모으는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다만, '20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 겸 이별 선언'이 '자신의 20대에 보내는 선물'이 되었다는 것, 그것만이 특별하다.



'
요즘 '너의 이름은'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화제다. 엄청 유명한 일본 영화 감독의 작품에다가 잘 빠진 내용, 이런 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런 이 영화의 한 가지 단점은 바로 '혼모노'들이다. '진짜'라는 뜻의 이 일본 단어는 단순히 오덕을 넘어서 영화관에서 민폐를 끼쳐가며 영화를 보는 탑 오브 탑 오덕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OST가 나오면 큰 소리로 같이 따라 부른다든가, 여주인공의 대사에 친히 남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받는 등... 

그러나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민폐 '혼모노'들이 아니다. 그냥 에반게리온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오덕들이다. 꼭 에반게리온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생의 어떤 한 부분을 뚝 잘라 보았을 때 절반을 차지 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혹은 진짜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연예인 같은 것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오덕의 기질이 있는 것이다. 아마 나는 한 때는 '닥터후'라는 영국드라마였고 이제 '장강명'작가의 덕후, 아니 빠순이쯤 되려는가 싶다.

내가 '닥터후'를 좋아해서 거기에 나온 '전화부스'나 '소닉스크류드라이버'같은 것들을 갖고 싶었던 것처럼 박종현도 에반게리온의 팬답게, 오덕답게 코스프레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왜 그 코스프레를 위해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하는 거냐고 묻자 종현이 대답한다. 

'재밌잖아요.' 

'재미? 그게 전부? 얻는 재미에 비해 들이는 노력이 너무 크다.'하고 반문하자 이번엔 변경희가 나선다. 

'만화 속 세상이 훨씬 더 멋있고 신나잖아. 코스프레를 하면 그 세상 안에 있는 기분이 들 것 같거든. 그러니까 현실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굳이 코스프레를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우리 같은 어린애들이나, 아니면 현실부적응자만 하는거지.'

'뭐야, 결국 현실도피네'
(p.78)

가끔 현실도피 좀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중략)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이 현실에 적응하라고 하는 말이 고깝다는 거야. 어떤 사람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평생 굶주리며 살고, 어떤 사람은 전쟁 중에 태어나서 비참한 꼴만 보면서 살잖아. 그런데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들한테도 현실에서 도망치지 마라, 현실을 직시해라, 세상은 지옥이다, 그렇게 말해줘야 할까?
(p.79)

박종현도 아마 그래서 에반게리온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자신을 버리고 도망 간 엄마, 무능하지만 착해서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 냉정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면서 속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을 지도, 그리고 그 탈출구가 '에반게리온'이었을 것이다.

저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에 여러 가지 문제로 상처를 받고 있었고, 외로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까짓것 대단한 시련이 아니야'라고 여기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편부모 가정은 많아요.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죠. (...)그 때 에반게리온은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미사토가 '진짜 나는 언제나 울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그 말뜻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p.61)

이건 박종현의 말이기도 했고, 나의 말이기도 했다. 나도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울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공감만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근원적인 상처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가 대학을 가고 알바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냥 '한국의 20대, 어떻게 살고 있나?'쯤의 제목을 단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다. 그건 박종현의 일상이기도 했고, 가난한 청년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회사에선 늘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노처녀 상사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중에 한파가 닥치고 내가 베짱이처럼 얼어 죽게 되면, 개미들이 말하겠지. 여유가 있을 때 저축하지 않고 미리미리 어려움을 대비하지 않아서 저 꼴이 났다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난 저축이고 뭐고 여기서 더 움직이질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고 무서워.
(p.177)

오늘도 기타를 배우러 시내에 가는데 아마 나는 베짱이인 듯 싶다. 베짱이... 베짱이...

아무튼 박종현은 그런 상사의 말을 되새기며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처음에는 너무 신나고, 무슨 의무처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점차 깨닫게 된다. 누에고치에서 갈라져 나오는 나방처럼 이제 그 에반게리온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어린애도, 현실부적응자도 아닌, 진짜 더럽고 냉혹하고 가족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박종현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토록 힘들고 차갑게 살진 않았는데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바닥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무어라 더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장강명의 '표백'이나 '한국이 싫어서'보다 더 따뜻하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슬프다. 그런데 그것보단 후련하다.
나의 삶의 한 부분을 떼어 예쁜 리본으로 묶고 이제 안녕, 하고 작은 입술로 속삭이는 기분이다.

너의 세상에서 살 때, 나는 정말 행복했어.

<그냥 읽고, 슬퍼하고, 따뜻해져라. 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SF나 판타지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장강명의 작품을 읽고는 조금 시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대부분, 아니 전세계적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해리포터 시리즈도 겨우 읽은 사람이었다. 뭐 '룬의 아이들'이니 '반지의 제왕' 같은 것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고 재밌다고 해도 나에게는 '파워포스레인저'만큼이나 유치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또 그 기이한 소재들을 영화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내 기억에는 SF소설들이 마치 도서관이 처음 만들어졌을 무렵부터 있던 것이라는 듯 먼지를 둘러쓰고 견고딕 같은 무성의한 폰트로 큼지막하게 제목을 박아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읽기가 꺼려졌다. 나는 듣도보도 못한 '천리안'을 포함해 PC통신이 막 생겨나서 부흥할 때 함께 쓰여진 글들이었다.

그리고 '천리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SF소설의 인기도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딱히 영화, 드라마화가 되지 않은 작품들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찾지 않았다. 웹소설에서야 매니아들로 인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뚝심, 혹은 특별한 기호를 가진 작가가 아니고서야 SF소설을 쓸 일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시니컬한 사회비판으로 '제 16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작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에반게리온을 좋아하고 드래곤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 그는 그런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아니 아예 내가 한 걱정들은 전혀 해보지도 않고 그냥 자기 좋은 대로 막 써보고 싶었던 대로 쓴 것 같다. 장강명 식으로다가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소설로 밥벌이를 고민하는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대중의 눈을 무시하고 그냥 쓰고 싶었던 SF를 썼다고? 어디서 그런 배짱이? 하는 생각들은 나만 했다. 장강명은 5년 만에 간 신혼여행지 보라카이('5년 만에 신혼여행') 에서 과연 이 '호모도미난스'가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기대하기까지 했다. (안타깝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이 작품으로 인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리스트에 문장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는 밥벌이를 고민할 지언정 대중의 눈치는 보지 않는다.' 한편, 그의 이런 기행을 믿어준 출판사 '은행나무' 역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아주 칭찬해'

      





이 소설은 책 뒤 표지에 흔하게 박히는 다른 작가, 평론가들의 추천사나 평가가 없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라. 당신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는 그가 바로,
너의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호모도미난스다!

그냥 이런 괴상한 문구만 박아놓았을 뿐이다. 심지어 '호모도미난스'라는 글자 위에는 여섯 개의 강조점이 뿅뿅뿅, 박혀 있기까지 한다. '2016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라는 수식어도 없이 그냥 '장강명' 이름 석 자만 딱, 박아 놓은 알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허례허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남다른 배짱!) 

그러니까 그냥 '장강명'을 믿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모든 작품이 좋았듯이 이 것 역시 그럴 것이라는 믿음. 그의 작품을 내놓기로 작정한 출판사의 마음이 이랬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 재밌었다. 사람 마음을 말 한마디로 조종하는 신인류 호모도미난스들이 ET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거부감도 없었고 중국, 한국, 일본, 거기다가 라오스나 위구르까지 넘나드는 글로벌한 스케일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읽는 내내 평범한 인간인 나는 그 곳들을 돌아다니며 그 신인류들이 벌이는 엄청난 일을 입을 헤, 벌리고 따라다녔다. (역시 사전 조사의 달인, 장강명)

팝콘 밑바닥에 숨겨놓은 이벤트 당첨권처럼 깔아둔 반전을 읽었을 때는 

     



SF소설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려준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일부러 이런 류들을 일부러 찾아 읽지는 않겠지만 이 소설을 시작으로 도장을 깨듯이 SF소설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갈 생각이다.

이 작품이 아니면 언제 또 전인류의 생사와 미래를 고민해 볼 수 있을까? 

다음에는 그의 또다른 SF작 '클론 프로젝트'를 읽어보아야겠다. 공대생인 그가 아직 기자가 되기 전에 재야의 고수처럼 숨어서 PC에 적어내린 그 '흑역사'(작가가 고백하길)를 말이다. 덜 익은 문체와 더 놀라운 상상력에 놀라게 될까? 아님 그도 이런 쑥스러운 소설을 쓸 때가 있었구나,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될까. 예상 외로 이 때부터 떡잎이 남달랐군! 하면서 감탄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의 팬인 나로써는 즐거운 일일 것이다. 비록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으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중박은 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중화장실에서 똥처럼 태어나 보육원에서 아무렇게나 길러진 주인공, 세상의 풍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권투'라는 것을 시작한 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련의 과정. 이 소설은 이렇게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장치들로 성장소설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 날카롭게 말하자면 김려령의 '완득이'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소설들을 적절히 배합 해 넣은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놓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 이미 본 듯한 상투적인 재료들로 쓴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어떤 불량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라는 보호구를 쓴 채 자신 앞에 맞닥뜨린 '사회'라는 상대방의 몸을 향해 쉴 새 없이 펀치를 날리고 있는, 젊고 반항기 가득한 권투 선수를 연상케 한다. 관중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환호를 지르다가도 그 놀라운 쨉 실력에 입을 쩍 벌리고 감탄을 내뱉게 하는 신인 권투 선수 말이다.



그 남성호르몬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날선 몸짓의 사내에게 내가 묘한 연민과 짠한 공감을 느꼈다면 우스울까. 그것은 그가 권투 가운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 쓰고 떠난 텅 빈 링 위를 망연히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 것은 그가 나고 자랐던 그 공중화장실과 보육원, 그리고 학교라는 작은 사회가 내가 살던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편모슬하, 편부슬하,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키워지는 아이, 지극히 가난하여 자신이 가난한지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들, 어딘가 비틀어지고 뒤틀린 환경의 아이들이 우리 반 구성원의 대다수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여러 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아이들이 대부분 다 그런 환경에서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p.28)



주인공의 묘사에 따르면 나는 두 번째, 세 번째의 아이들에 속했고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와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한 마디로 빨랐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가 오재호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이 불의한 상황에서 누군가 최소한의 정의를 외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그를 외면한 반 아이들 중 한 명이 나라는 점이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내뱉은 '정의? 대한민국에 여즉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긴 한가?'의 답을 겨우 초딩 밖에 안되는 것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장태주가 오재호를 한 방에 쓰러뜨린) 이후 나는 '선도연합회'에 꼬박꼬박 회비를 내는 성실하고 비굴한 납세자로 성장한 것에 반해 주인공은 '권투'를 배워 '성장'하는 것을 택한다. 사람과의 경기였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늘 매몰차고 편파적이었던 사회와 가장 공평하게 싸워 이기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경기를 한 장 한 장 챙겨보면서 그가 KO로 승리할 때마다 통쾌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과 자괴감이 남아 있었다. 그건 내가 (비유하자면) 일진들이 나쁜 짓을 하는 동안 망을 봐주는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이 날리는 쨉을 선망하는 이중인격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소시민'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그토록 경멸하던 '힘의 논리'와 '돈'에 편입되는 것을 보면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시장에서 할아버지를 뒤를 졸래졸래 쫓아다니며 튀김을 주워 먹던 시절을 기억해 내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경기를 KO로 끝장내는 '챔프 미스터 티'는 영웅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끈적끈적한 것들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달콤한 행복에서 오는 외로움과 공허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그가 그 소리들을 외면하면서 승리의 경기를 계속할 때, 그는 결정적 한 방을 맞고 쓰러진다. 그 것은 뜻밖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그 일격의 카운터펀치는 '챔프 미스터 티'인 그를 맥 없이 바닥에 뻗어버리게 했다. 자신이 소년원을 막 출소한 문제아든, 잘 나가는 권투선수든 어떤 모습이어도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해줄 받침대가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가 가장 경멸하던 '돈'에 눈 먼 사람들이 날림으로 공사해 버린 그 다리를 건너다가 말이다. 



현재의 이익에 몰두한 자들이 빚어낸 예정된 참사, 그로 인해 가족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을 잃고 만 주인공의 끝없는 추락을 보는 것은 그를 지지했던 팬인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p.354)'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그 한 마디가 소설을 덮고 나서도 내내 마음을 때렸다. 마치 영화 '해바라기'의 김래원처럼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하고 작가에게 따져 묻고도 싶었다. 허나 작가는 내 무언의 항의를 들어서 주인공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대신 그가 바라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듯한 암시만을 줬을 뿐이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제 두 발로 똑바로 서는 것을 연습했던 그 '낡은 체육관'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가 그 곳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건 은퇴자의 쓸쓸한 퇴장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움을 거듭하다가 에라이, 안되면 귀라도 물어뜯자! 하고 이빨을 드러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뜨거운 뒷모습인 것이다. 그의 투지를 보면서 나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비유하자면) 일진들의 나쁜 짓을 알고도 모른 척 했던 나의 잘못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놈과 알면서도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놈들을 제일 먼저 족쳐야 한다는 주인공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지 않기 위해서 이제 내가 그 링 위에 올라가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의 경기가 시작이다.


질 것 같으면 에라이, 귀라도 물어 뜯지 뭐!


번외)  작가의 사진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선이 굵은 얼굴, 다부진 어깨와 체격, 핏줄이 불룩 솟아 있는 단단한 손...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디서 권투라도 배운 게 아닌 가 싶었다. 실제 권투를 배웠는 지는 몰라도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상에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고, 보기 좋게 쨉을 날려본 적도 있는 '선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갑자기 어디서 뿅, 하고 튀어나온 게 아닌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멋진 작품으로 탄생시킬 줄 아는 작가에게 응원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강명, 내가 이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굉장히 노골적으로 세상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차가운 바닥이 닿을 정도로 발을 푹 담그고 휘젓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기자 경력 때문인지 사회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눈빛이 칼날처럼 시퍼렇다.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빠르고 독합니다
작가 인터뷰 中

2012년 대선 당시, 상대 후보를 비방하고 모략한 그 수많은 댓글들과 자료들이 대부분 국정원의 여론 조작에 의해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당시의 나 역시 각종 커뮤니티 등지에서 그런 내용들을 자주 접하면서 팩트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숟가락을 들어 떠먹여주는 수프와도 같았다. 그것이 진짜 브로콜리 수프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위해 재료의 출처를 일일이 찾아보는 것은 대부분의 평범한 네티즌들에게 아주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국정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강명은 국정원 댓글부대 사건을 서술하지 않는다. 대신 2세대 댓글부대를 창조하여 그들이 어떻게 여론을 조작하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삼궁, 찻탓캇, 01査10 세 명으로 구성된 조직의 이름은 '팀 - 알렙'.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신상을 저격하거나 회사의 PR을 맡아서 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들이 남기는 댓글, 즉 의견들이 거대 비밀 세력 '합포회'의 눈에 띄어 함께 일하게 되면서 '팀 - 알렙'은 점차 한국이라는 나라를 키보드 하나로 좌지우지하는 '민심'으로 변모하게 된다.

민심(民心)은 곧 조직이다. 그리고 다수는 늘 힘이 세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시국이 어려울 때는 다들 촛불을 들고 나와 정치를 바로 세우는 등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개인이나 소수를 다수의 이름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곳은 그런 일이 자주, 쉽게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누구나 '댓글'로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었고 마음을 조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약간 흥분한 글에는 '회원님, 이 글은 논지가 좀 안맞는 거 같네요. 이곳의 수준이 겨우 이런 것이었습니까.' 따위의 점잖은 말로 훈계를 두면 처음에는 '훈장질', '선비노릇'하지 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다가도, 한 명, 두 명, 세 명(소설은 같은 의견에 동조하는 세 명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만 있으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이건 진짜다. 다시 말해 팩트. 그래, 요즘 네티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팩트'말이다. 나쁜 말로 하면 '선동'  장강명이 얼마나 사전조사를 많이 하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 잡듯이 털고 다녔는 지 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소름이 돋는다. 이건 사람을 묶어 놓고 꽃 속에 숨어있던 벌레들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징그럽도록 사실적이다. 나도 이런 방법을 누군가 쓰고 있진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이걸 감히 소설로 내놓을 생각을 하다니, 역시 장강명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페이스북의 신문 기사에 누군가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기만 해도 우르르 몰려들어 '확실치도 않은데 선동하지 말라', '급식충들의 페이스북 정치' 등 점잖을 가장한 비난들이 솟구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산 노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린 그 다음 세대를 공략해야 해. 아직까지는 머리가 그렇게 굳지 않은 애들. 그 아이들의 정신이나마 건강하게 만들어야 해. 
(p.152)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포함한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를 겪은 그는 온 국민이 '잘 살아보세'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함께 고지를 넘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정치하는 친구들은 그걸 몰라. 경제가 사회분위기를 결정하는 게 아니야. 사회 분위기가 경제를 결정하는 거야. 집단의 힘, 군중의 마음!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믿음을 품게 되면, 주변이 다 잿더미고 쓰레기산이어도 상관없어. 인간은 강한거야.
(p.147)


그래서 '남산 노인'은 지금의 이 암흑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 가난한 청년들이 으쌰으쌰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경제가 어렵다고, 복지가 부족하다고 불평불만 하는 것이 결국 나라를 좀먹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여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돌아다녔다면 '남산노인'은 '노오력'만을 가장하는 '꼰대', 혹은 '틀딱충'으로 전락하고 말테지만 그가 눈물을 쏟으며 주장하는 호소는 나라를 향한 충(忠)의 진심이 느껴져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10대'들이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청소년들, 그들이 곧 유행을 선도하고 여론을 만들어 갈 중요한 요충지인 것이다. 

결국 노인의 바람대로 '팀 - 알렙'이 만든 '나는 강하다,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라는 구호를 따라하는 10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위험한 놀이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턱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약을 받지 않고 버티는, 다친 건 내 탓이니까하고 감수하는 이들이 는 것이다.

이들의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이들이 청년세대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으쌰으쌰 하여 나라의 경제 성장을, 예전의 영광을 이끌어낼 것인가. 

마치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소설을 읽었다. 서사를 따라가느라 숨이 가쁘기도 했고 냉혹한 현실에 몸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다. 맛있는 저녁반찬을 차릴 때는 유용한 칼이 사람을 찔러 죽일 수도 있는 것처럼 휴대폰과 컴퓨터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니 이것을 만지는 것도 어쩐지 께름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강명은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파시즘'을 재현한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그 '두려움'이라면 이 작품은 성공이다. 나를 비롯한 다른 독자들에게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어떤 깨달음이 왔으리라. 

나는 이 것을 단 한 단어로 정리한다.

'소신'


**번외

이 소설은 전적으로 허구입니다. 작가인 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찬성하지 않고, 어떤 인물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p.243)

장강명이 '출처에 관하여'라는 페이지에 남긴 말이다. 혹자는 이 말을 '작가정신'의 부족함으로 보고 비판했다. 나 역시 이에 어느 정도 동감한다. 5.18을 그린 '소년을 위하여'의 작가 한강이나 여타 다른 작가들이 국내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특히 민중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당시의 지도자나 정부를 비판하기를 망설이지 않기 때문에, (최근 이와 관련한 책을 펴낸 출판사들이나 작가들이 정부의 블랙리스트로 찍혀 곤혹을 치뤘다.) 장강명의 이런 태도는 그저 허구의 이야기, '이건 그냥 뻥이야!'라고 말해서 독자들의 맥을 빠뜨려버리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설 중 '가장 독하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그냥 독자들이 한 편의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오, 대박, 잘 만들었는데?'이런 느낌을 가지길 원했던 것일까. 현실의 의미를 담지 않고 '독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의 기관과 기업 등에서 모티프를 따오고 거의 흡사하게 이미지를 구현하여 놓고 사실 이건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손사래를 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소설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고 무언가 깨달은 독자들은 그럼 무엇을 읽은 것인가. 작가는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이 전달되길 원했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팝콘을 씹어먹으면서 극장을 나와 아무렇지 않게 밝은 빛의 세상으로 다시 나가길 원했을까, 아, 그 영화 참 잘봤다, 다음엔 카페 갈까? 이렇게 대화하길 원하면서?

장강명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여러 이유 중에 세 번째 쯤, '돈'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간과하고서 여타의 이유들을 쫓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나는 그의 이런 솔직함이 좋았다. 문학인이라고 교양을 떨거나 도통 속세에는 관심이 없단 듯 고고한 척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그의 위 같은 고백은 그를 좋아했던 나를 조금 슬프게 했다. 국정원 여론 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그 젊은 여직원처럼 그 역시 '생'의 위협을 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한편, 그가 쓰는 작품에 어떤 정치적 프레임이 덧입혀지는 것을 원치 않기도 했으리라. 앞으로 쓰여질 작품이 어떤 내용이든 이 소설로 인해 독자들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읽지나 않을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내가 그의 소설을 너무나 좋아하기에 이렇게라도 그를 두둔해보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