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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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려온 그의 책들 중 이제 남은 건 '뤼미에르 피플', '다행히 졸업', '표백' 그리고 '열광 금지, 에바로드'. '뤼미에르 피플'은 연작소설이라 약간 망설여지고, '다행히 졸업'은 장강명 외에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하므로 살짝 뒤로 미루고, '표백'은 몇 해 전에 이미 읽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열광 금지 에바로드' 뿐. 

'에바로드'가 일본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따왔다는 것은 책 소개를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막 SF의 맛을 알았는데 또 그런 류를 읽는다는 것은 조금 물리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애니메이션이라니,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늑대아이' 등을 겨우 본 사람이다. 특히 '늑대아이'를 풀로 봐야 했을 때는 거의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아,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편식주의자인가.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이 소설을 읽기가 조금 꺼려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명 '믿보작(믿고 보는 작가)' '장강명'의 이름에  '제 2회 수림문학상 수상'이라는 인증을 믿고 가기로 했다. 설사 너무나 난해한 애니메이션 내용이더라도 아무렴 어떠냐, 장강명인데? 싶은 심정이었다.

'평전'이라는 형식을 빌려온 이 소설의 서술자는 뜻밖에도 '기자'다. 옛날에는 에반게리온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뭐 다 옛날얘기인 듯 싶은 그런 평범한 기자. 그가 인터뷰하는 '오덕'이 주인공이다. 그럼 이 '오덕'이 과연 어떻게 생겼냐, 하면

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많고, 돼지 같은 체형에다 '하,하,하;따위의 어색한 웃음을 남발하면서 오덕 용어를 쓰고, 상대의 어리둥절해 하는 반응에 곧바로 풀이 죽는 스타일 말이다.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은 당연히 없고, 친한 친구도 없으며, 사교성은 빵점에(후략)
p.12

이만 줄이자.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덕의 이미지에 딱 들어 맞을 테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인터뷰이 '박종현'은


























이렇게 생겼다.

안여돼이기는커녕, 굉장히 잘새긴 청년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색기가 줄줄 흐르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호감형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는지?
(p.13)

서술자의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이 당황스러움과 얼떨떨함이란! 나는 왠지 저 묘사대로 서강준을 닮았을 것만 같은 박종현을 상상하며 소설을 읽었다. 이 리뷰에서 박종현의 외모가 중요한 이유는 그게 우리가 갖는 오덕의 편견을 깨는 첫 번째 일이기 때문이다. 혹 저렇게 우월하게 생기진 않더라도 오덕은 외모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어떤 전문가가 말하길 앞으로는 '오덕'이 살아남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방문 꼭 닫고 자기만의 세계에 열중하는 그런 사람 말고 무언가 한가지라도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잘하는 사람 말이다.(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분 탓?)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경쟁력을 갖고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까진 아니다. 

그냥 곧 서른을 앞둔 만 29세의 청년이 청소년 때 좋아하던 '에반게리온'의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한중일을 돌아다니며 스탬프를 모으는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다만, '20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 겸 이별 선언'이 '자신의 20대에 보내는 선물'이 되었다는 것, 그것만이 특별하다.



'
요즘 '너의 이름은'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화제다. 엄청 유명한 일본 영화 감독의 작품에다가 잘 빠진 내용, 이런 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런 이 영화의 한 가지 단점은 바로 '혼모노'들이다. '진짜'라는 뜻의 이 일본 단어는 단순히 오덕을 넘어서 영화관에서 민폐를 끼쳐가며 영화를 보는 탑 오브 탑 오덕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OST가 나오면 큰 소리로 같이 따라 부른다든가, 여주인공의 대사에 친히 남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받는 등... 

그러나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민폐 '혼모노'들이 아니다. 그냥 에반게리온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오덕들이다. 꼭 에반게리온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생의 어떤 한 부분을 뚝 잘라 보았을 때 절반을 차지 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혹은 진짜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연예인 같은 것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오덕의 기질이 있는 것이다. 아마 나는 한 때는 '닥터후'라는 영국드라마였고 이제 '장강명'작가의 덕후, 아니 빠순이쯤 되려는가 싶다.

내가 '닥터후'를 좋아해서 거기에 나온 '전화부스'나 '소닉스크류드라이버'같은 것들을 갖고 싶었던 것처럼 박종현도 에반게리온의 팬답게, 오덕답게 코스프레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왜 그 코스프레를 위해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하는 거냐고 묻자 종현이 대답한다. 

'재밌잖아요.' 

'재미? 그게 전부? 얻는 재미에 비해 들이는 노력이 너무 크다.'하고 반문하자 이번엔 변경희가 나선다. 

'만화 속 세상이 훨씬 더 멋있고 신나잖아. 코스프레를 하면 그 세상 안에 있는 기분이 들 것 같거든. 그러니까 현실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굳이 코스프레를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우리 같은 어린애들이나, 아니면 현실부적응자만 하는거지.'

'뭐야, 결국 현실도피네'
(p.78)

가끔 현실도피 좀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중략)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이 현실에 적응하라고 하는 말이 고깝다는 거야. 어떤 사람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평생 굶주리며 살고, 어떤 사람은 전쟁 중에 태어나서 비참한 꼴만 보면서 살잖아. 그런데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들한테도 현실에서 도망치지 마라, 현실을 직시해라, 세상은 지옥이다, 그렇게 말해줘야 할까?
(p.79)

박종현도 아마 그래서 에반게리온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자신을 버리고 도망 간 엄마, 무능하지만 착해서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 냉정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면서 속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을 지도, 그리고 그 탈출구가 '에반게리온'이었을 것이다.

저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춘기에 여러 가지 문제로 상처를 받고 있었고, 외로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까짓것 대단한 시련이 아니야'라고 여기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편부모 가정은 많아요.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죠. (...)그 때 에반게리온은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미사토가 '진짜 나는 언제나 울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그 말뜻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p.61)

이건 박종현의 말이기도 했고, 나의 말이기도 했다. 나도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울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공감만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근원적인 상처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가 대학을 가고 알바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냥 '한국의 20대, 어떻게 살고 있나?'쯤의 제목을 단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다. 그건 박종현의 일상이기도 했고, 가난한 청년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회사에선 늘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노처녀 상사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중에 한파가 닥치고 내가 베짱이처럼 얼어 죽게 되면, 개미들이 말하겠지. 여유가 있을 때 저축하지 않고 미리미리 어려움을 대비하지 않아서 저 꼴이 났다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난 저축이고 뭐고 여기서 더 움직이질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고 무서워.
(p.177)

오늘도 기타를 배우러 시내에 가는데 아마 나는 베짱이인 듯 싶다. 베짱이... 베짱이...

아무튼 박종현은 그런 상사의 말을 되새기며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처음에는 너무 신나고, 무슨 의무처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점차 깨닫게 된다. 누에고치에서 갈라져 나오는 나방처럼 이제 그 에반게리온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어린애도, 현실부적응자도 아닌, 진짜 더럽고 냉혹하고 가족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박종현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토록 힘들고 차갑게 살진 않았는데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바닥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무어라 더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장강명의 '표백'이나 '한국이 싫어서'보다 더 따뜻하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슬프다. 그런데 그것보단 후련하다.
나의 삶의 한 부분을 떼어 예쁜 리본으로 묶고 이제 안녕, 하고 작은 입술로 속삭이는 기분이다.

너의 세상에서 살 때, 나는 정말 행복했어.

<그냥 읽고, 슬퍼하고, 따뜻해져라.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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