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바꿀 권리를 예약해두고 있다.

"오만함은 무지에 확신을 합한 것이다. 겸손함이 인생의 경험을 흡수해서 이것을 지식과 지혜로 바꾸어놓는다면, 오만함은 인생의 경험을 튕겨내는 고무 방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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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겸손함 필요 공동선(사회적 연대) 추구
내가 이룬 것들은 내 능력덕이 아니라 행운의 영향
50:50 중 어느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가
능력주의vs행운/유전/사회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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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있는가?‘ 능력주의 옹호론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서도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경쟁의 승자는 보상받을 만하다. 누군가가 다른 이보다 빨리 달렸다고 부정의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이에크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하이에크가 능력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재분배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롤스가 능력이나 자격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
즉 ‘재분배 요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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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행운 평등주의자 LuckEgalitarians‘라 불렸던 그들은 사회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한 의무를 따질 때, 자신의 불운에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단지 운이 없었던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의 곤경에 대한 책임이 없는사람만이 정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된다. 이는 여러 가지의 태도와 상황을 포괄한다. 그런 많은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능력주의를 유해하게 만든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라는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꺾는다.

두 번째,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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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옆문과 뒷문 - 대학 입학 비리

경쟁승리자 엘리트 -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는 현상

공공선을 찾는 것은?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첫 번째 진단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두 번째 진단은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라 본다.

공공선public good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이동이 가장 잘 일어나는 국가들은 평등 수준또한 가장 높은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 사회적 상승의 능력은 가난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교육, 보건을비롯해 직업 세계에서 개인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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