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행운 평등주의자 LuckEgalitarians‘라 불렸던 그들은 사회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한 의무를 따질 때, 자신의 불운에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단지 운이 없었던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의 곤경에 대한 책임이 없는사람만이 정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된다. 이는 여러 가지의 태도와 상황을 포괄한다. 그런 많은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능력주의를 유해하게 만든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라는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꺾는다.
두 번째,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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