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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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마샤두 지 아시스 작품 국내 첫 번역본.

'브라질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며 세계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가'라고 소개되는 마샤두 지 아시스는 사실 처음으로 접하는 작가였다.

글 속에는 여러 정치가, 역사가들과의 친분이나 서구 고전들(드 메스트르는 방을, 가헤뜨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스턴은 타인의 고향을 여행하는 등 이들 모두는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는 표현 외 고전 작품들의 영향을 다수 볼 수 있다)과도 명맥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탈당의 독재시절부터 갓 독립한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노예해방(1888)과 공화정으로의 전환(1889)) 등 당대 사회현실(남녀문제, 노비와 정계 등 폭넓은 사회계층의 문제)들이 녹아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이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의 두 세기의 생활양식이 엉켜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역시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니까) 감정적인 고뇌와 정신착란의 감정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니까)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책,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다.




사실 어릴적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이라는 책을 접한 이래,

죽음에 관한 책, 특히 자살에 관한 글이라면 관심있게 읽어왔던 것 같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으로 가고 있어.' 라는 아이러니한 문장에 열광하면서, 만화책이나 소설 등에의 대사에서 이와 관련된 문장들이 나올 때면 관심있게 지켜봤다. 현실이라기보다 다소 열병이나 환상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회고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사후'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책의 서문에 나와 있는 글귀처럼, "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 소설인가?"

질문에 이 책에 몇몇 사람에게는 '예', 이면서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했다는 이 책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오. 아마도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인,

나 '브라스 꾸바스'가 자유형식을 취했는지, 염세주의의 투정을 집어넣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오."

이미 죽은 사람의 작품이니, 그러면서도

『브라스 꾸바스』를 『나』 라고 표현했으니 정말 소설이자 소설이 아닐 수 있겠다.

자전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다른 자전소설과 달리 (세속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저승에서 (세속적 의무와 책임 속에 살았던)이승의 삶을 회고하는 책이라니.

난 이 작품을 우울의 잉크를 묻힌, 소란스럽고 밝은 펜대로 썼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나는 책의 초반에 나오는 이러한 표현에 박수를 치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삐뚤어져있고 적당히 진지한, 익살과 허무가 잘 섞인 이런 문체, 환영한다.


사망한 뒤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건,

죽음(死)뒤에 다시 삶(生)을 살아보는 것.

글은, 총 160장(章, 번호메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 번호는 사후 회고록에 걸맞게 '죽음'에서 시작한다.

1. 저자의 죽음

1805.10.20일에 탄생하여 1869년 8월 어느 금요일 오후 2시, 가뚱비 별장에서 향년 64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독신이였고, 300 꽁두의 재산을 소유했었으며, 11명의 친구가 있었다.

1. 저자의 죽음, 작가가 된 고인

흥미로운 시작이며, 사후 회고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화자인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이 1869년 64세로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삶은 1839년-1908년으로 작가의 죽음보다 100년(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그래서 인지 책 속에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중학교때였나, 도덕시간에 수행평가로 이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주제는 '미래 설계'였지만 이미 다 이룬뒤에 과거를 반추하며 써보는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의 형식이였다.

그때 나와 친구들은 자신이 어떠한 업적을 남기는 것 보다,

어떠한 형태로 죽느냐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병사냐, 자연사냐, 사고사냐, 안락사냐 등등.

죽음을 선택할 순 없지만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돌아보게 만드므로, 살아있는 도중에 to do list/bucket list를 만들게 하므로, 그렇게 일상을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기에 그 시기에 이러한 생각들을 공유하는건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실제적 현실로 다가온다는건 다른 문제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죽음은 그다지 드라마 틱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오케스트라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덜 슬펐다.'

'의식이 빠져나간 나는 육체적, 정신적 부동상태에 접어들었다.

육체는 나무, 돌, 진흙,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렸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2. (브라스 꾸바스) 고약.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의 사인이 실은 고약'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나는 이제 저승에 있으므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나에게 주된 영향을 끼친, 마침내 약상자에 씌어질 다음과 같은 세단어'

라며 야심차게 발명한 이 고약',

"인류의 우울을 완화시키는 숭고한 의약품"- 브라스 꾸바스의 고약.

이 고약이, [명사]로 쓰이는 '주로 헐거나 곪은 데에 붙이는 끈끈한 약'을 말하는지,

[형용사]로 쓰이는 '흉하거나 험상궂다. 성미나 언행 따위가 사납다'는 뜻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그 고약에 대해

'우울증의 꽃보다 덜 노란색이면서 전혀 병적이지 않은 꽃'이라며

'명성애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건데 아마도 사랑(인류애)이라기 보다 갈망(명예욕)이지 않았을까 싶다.

3~160.부정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1, 2장을 시작으로 그렇게, 족보 (18세기 다미어웅꾸바스를 시조로 서류를 위조하여 귀족이 된다), 그날(탄생일), 가족소개,를 시작으로 일생의 중요한 사건, 학교생활, 포로생활, 첫사랑 (내 젊음의 첫 감동) 엄마의 죽음, 아빠의 죽음 , 불륜, 사업실패, 주변인들의 죽음 등의 자신의 일대기와 주요 사건들을 서술에 담는다는 것은 전형적인 회고록의 형식을 갖춘다.

그러면서도 강박관념(강박을 갖기 보다 스스로 되묻는 자가 되길) 정신착란, 부도덕한 생각 등등 신념, 생각, 철학, 고정관념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회고(책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독신의 삶으로 결핵으로 사망한 뒤에 자신의 겪었던 정신착란의 증상들을 고백하며 탄생부터의 연대기를 쭈욱 서술한다. 1805년 브라스 꾸바스는 히우지자네이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의 일대기와 첫사랑(마르셀라)에게 선물을 하느냐 아버지의 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손을 대어 강제로 유학을 가게 된 청소년기, 대학생활과 어머니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기, 아버지의 연방하원 의원제안과 결혼제안(비르질리아)을 받아들였으나 의외의 인물(네비스)에 의해 출세와 결혼 모두 실패한 일화, 사교모임에서 결혼할 뻔 한 그녀를 다시 만나 불륜, 동거, 권태기, 이별을 겪은 일화, 어릴 적 친구(보르바)가 설파하는 ‘후마니티즘’의 철학적 대화, 장관직과 신문 창간의 실패, 새로운 여성과의 사랑(냥놀로)과 죽음, 이전 사랑(비르질리아)의 남편의 죽음, 옛 친구(보르바)의 치매와 죽음을 거치며 그렇게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내 불행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았다”라는 유언을 남긴 죽음에 까지 다시 이르게 된다.



이름만 부르고 끝난다던가,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로 끝난다던가,

몇줄의 문장으로 끝난다던가 하는 니맘대로인 회고록.

연설문장이라던가 묘비명만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강렬한 전달력을 주기도 한다.


재미있는건, 그가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였으므로,

아주 '감정적인 서술'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그가 처음 '산만한 작품'이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그 자체가 들쑥날쑥한 인간이기에 현재의 감정들을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착각이나 일시적인 경련으로 보듯 서술하는 장면 묘사들은 역시 그가 죽어서 쓴 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서 얘기했던 '염세주의적인 투정' 때문일까.

문장력이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나를 믿어라. 가장 덜 나쁜일은 추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을 믿어선 안된다.

세월이 흘러 경련이 멈추면 진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

너는 이제 무엇을 더 원하나?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된 나' 라지만 늘 '현재가 과거를 몰아내는 현실의 압도'에서 살아가고, '애벌레'이자 '숭고한 멍청이'로서 '그저 사는 것'에 대한 삶의 철학이 숨어 들어 있다. 시간엔 흘러간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순간이 중요한 법이다. 삶의 재앙과 기쁨, 삶의 영광과 비참함을 더 번식시키는 사랑, 쇠약, 욕망, 분노, 질투, 야망, 배고픔, 공허와 우울, 부와 사랑… 이 세기의 삶을 삼키며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고, 다른것처럼 소멸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러한 삶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에 주목할만하다.

재미있고 한번 경험해볼 만하죠.

아마 단조롭겠지만 해볼 만 해요. 재미있을 겁니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망자의 경멸적인 시선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삶을 그저 그렇게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다가올 순간이 흘러갈 순간보다 중요하다.

강하고, 기쁘고, 죽고, 소멸하고 흐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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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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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

<시절과 기분> 앤드게임, 김봉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그와의 일을 글로 써 '소설가'가 된

'지금'의 자신을 긍정하고 싶을 때 떠올리는 문장이다.

이제 그와의 일을 '글'로 쓴다는 것(문학)

이제는 홀연 마음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대하는 기분'을 마주하는 것이었고,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형섭

나의 첫 대뷔 소설 뿐만아니라 첫 단행본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 쓴 글(문학, 소설)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시간(삶)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문학 아닌 삶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살아야 하는 시간이 압도적이라는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굴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알아야 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의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

되찾을 풍경과 열린 시간 속에 그의 모습을 나는 꼭 알아야 겠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다.

<시절과 기분> 김봉곤

다시 한 번 내 시간 속에서 내 시간 속의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아주 짧은 사족을 얘기하자면 며칠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며칠전, 지인과 북카페에 갔을때 (물론 목적은 수다였지만) 카페의 책장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씩 골라 자리에 앉았다.

지인이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책을 선택했을때, 난 이미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옆에서 신나게 스포를 해댔다.

"나 이거 읽을때, 중반까지 동성앤지 모르고 읽었잖아 ㅎㅎ"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의 저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설 속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무렵에 와서야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은 비단 이름이 중성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책 속 단편 「그 여름」과 「고백」 에서 여성 동성애자가 등장 했었고 그들의 연애사를 읽는 것은 낯선 경험이였다. 그러자 지인이 '그러고 보니 일전의 쇼코의 미소도 우정인지 연애인지 모르게 애매한 글이였잖아. 이 작가가 그런 글을 잘쓰나 보지.' 라고 답했다.

그게 고작 며칠전의 일이였는데.

이 책의 초반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이별'의 통증을 겪는 두 사람이 남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며 지나고 나서야 '아, 이 두 사람 남성 동성애자였구나' 라는걸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억양, 키·몸무게·발사이즈까지 같았던 체형, 옷과 스타일을 항상 골라주어야 했던, 무던하고 무심한 타입이지만 과묵하진 않던, 나와 닮은사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헤어지고서도 이년을 더 함께 살아,

나와 오년을 함께 살았던 사람. "

이라는 부수적인 설명이 나올 때에도,

'응? 어떻게 남녀가 키,몸무게,발사이즈가 같을수가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나갈정도로 편견은 이어졌다. 편견은 그 틀안에서 무너져 있는 디테일을 그냥 넘어가게 만들정도로 울타리가 큰 모양이였다.

심지어 책 속에서 '게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때도,

'아! 남자가 게이라는걸 깨닫고 여자를 떠났구나!'라는 바보같은 스토리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더 뒤로 가서야 아차 싶었던 나는, 그 지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별한 두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라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 글,

『시절과 기분』 이다.


우리는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도

'기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진 못한다.

<시절과 기분> 앤드게임, 김봉곤

(익숙한 풍경) 시원했던 여름집, 물까지 얼어버렸던 추운 겨울, 꾸벅이던 아침, 각자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밥을 먹었던 집, 기르던 강아지가 문지방을 다 갉아 놓은 집이 그 장막 너머에 있었다. 우산을 일층으로 던져주던 모습, 항상 내차지던 화장실 슬리퍼, 그를 배웅하던 현관 등이 그 너머에 있었다.

(익숙한 대답) 효효, 끼오옹! 컁캬아아앙- 미쳤돼지다 … 등

우리만의 유행어는 여전히 쓰면서도, '자기야'에서 '야'로 바뀐 호칭을 줄임말로 착각하는 일 같은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연인이던 시절, '함께 살던 시절'의 바람이나 불행, 추억할만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어도 '사랑했던 우리'(의 기분)에 대해서는 마치 그랬던 적이 없었던것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때의) '일상'에 대해 얼마든 말해도 좋았지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때 네가 찾아와 얼마나 '기뻤'었는지, 사랑을 나눈 일이 얼마나 '짜릿'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사건만 남기고 감정을 제거한 선택적 추억이라는게 있을 수 있을까.

이쯤 되니 '시절'이라고 말하는 시간적 과거와

'기분'이라고 말하는 감정적 과거의 차이점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참으로 탁월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내가 연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지나,

점차 친구라는 사실조차 희미해져갈 것임을.

이제는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음을,

그에 대한 글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될 그는

소설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만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한다.

<시절과 기분> 김봉곤

시절은 지나간다.

감정도 지나가는 것일까.

때때로 감정은 고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때때로 넘쳐나기를 반복한다.

감정이 지나갔다는 말은 써 본적이 없다.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시절을 돌아볼 때의 감정은 그때마다 다르구나.

아무것도 아니였다가, 좋아보였다가, 서글펐다가, 그렇게 달라지는 구나.

이별을 겪었을때의 감정은 죽음을 받아들일때의 감정변화와 비슷하다고 했다.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분노하고, 협상하다가 절망하고, 이내 수용하게 된다 했던가. 그렇게 수용하는 듯 하다가 다시 부정하는 것으로 가는 건 아닐런지.

감정이 남아 있을땐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이 부풀어 올라 수용은 더더욱 힘들겠다.

" 나는 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받았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정작 자립을 가르쳐 주지 못한 자격 미달의 선생처럼,

좀, 실패한 사람의 기분으로,

그럴 필요도 없으면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되어 … "

미운거 같다가, 미안했다가, 용기내려 하다가도, 이내 자신없어지고 마는.

감정은 그 시절 안에 있을 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더니

그 시절 밖에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잊혀지고 싶지 않다.

잊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애써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김봉곤 작가의 전작인 『여름, 스피드』 가 영화 Call me by your name 의 원작소설인 『그해 여름 손님』 의 제목과 비슷해서 일까, 같은 소재를 다루어서 일까, 어쩐지 자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엘리오가 우는건 그 시절 때문일까, 지금의 기분 때문일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시절과 기분』 을 읽다보니 김봉곤의 전작이 궁금해 졌다.

이번에 두번째로 등장한다는 이름을 첫번째 작품에서 찾기 위해서 였다.

김봉곤 작가를 몰랐다 하여 편견으로 읽었다고 했던가.

김봉곤 작가를 알았다 한들, 당연히 동성애 소설이겠지 하고 읽는것은 또 맞는건가.

그것 또한 모르는 일이다.

어쨌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그와의 일을 글로 써 '소설가' 되었다고 말하던 대뷔작 「Auto」 , 그리고 그 연장선인 「컬리지포크」 품을 찾아 읽어보니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형섭 (그)

-쿠마 (그와 기르던 강아지)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나,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구." 라며 이별을 선사하는 연인.

그렇게 헤어지고도 이년을 더 동거했던 연인.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라는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던 그들이 있었다.

툭, 내뱉는 이별의 말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생각나게 한다.

갑작스럽고 일방적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나의 세계에, 사전에, 사랑하지 '않는'일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정의처럼 사랑 역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지 않는 세계를, 그때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의 글쓰기'를.


강렬했던 사랑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 쓰기,

허무하고 진부한 연애사건으로 잘못 기억될 뻔했던 것을 사랑으로 다시 쓰기.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알고 싶다.

글을 쓰는 이유, 딱 두줄, 단순하고 자명했다.

시절과 기분은, 이별 앞에서도 사랑의 시간으로 걸어가는 길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단순히 이별을 못받아들인다기 보다, 이 기분은 뭘까, 이별 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는걸까, 그 시절이 아름다워서 못있는걸까 네가 여전히 아름다운걸까, 등을 끊임없이 물으며 시절과 기분에 다가서는 느낌이다.

우리에게 반짝임이 남았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모르겠고 그러기에 더욱더 알고 싶어진다.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여름, 스피드> 김봉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기에,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는 느낌의 책, 『시절과 기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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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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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하루의 끝에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 비스듬히 문가에 기대어 있는 택배물을 발견한다. 바로 #창비 로부터 온 책이였다.

아아, 이건 분명 얼마전에 창비에서 '응원을 선물해 드립니다'라는 이벤트에서 스스로에게 파이팅 하는 응원글을 쓰고 당첨되어 온 『#그림을그리는일』이라는 책이다.

책을 발견하자 마자 벌써부터 하루의 끝에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그 흔한 위로의 말을 들을 것 처럼 힐링이 되었다.

몇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침대맡에 누워 스텐드 불에만 의지한 채 페이지를 펼쳤다.

만화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다 읽고 잠을 청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난 첫 페이지부터 마음을 빼았기더니 이내 몇 페이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코끝이 찡하더니 이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다가 결국 울어버렸고,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못읽고 잠이 들었다.

나는 뭐가 그리 서글펐을까.


내 청춘도 영화 같았으면 했다. 결과야 어떻든 청춘의 시절이 눈부신 기억으로 남았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편집없이 길고 지루하다. 이 길고 지루한 영화의 끝이 그림이 아닐수도 있겠다. 너무 슬프지만 않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그림을 그리는 일>,초록뱀

'꿈', 이라는 말은 여전히 뭔가 몽롱하고 멀리 있는 느낌이다.

'현실', 이라는 말도 여전히 크게 와닿지 않는다. 알긴 알아버렸지만 아직 잘은 모르는것 같은 어설픔.

그 사이에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취미로 꾸준히 하는 나는, 언젠가 취미로 사주를 봤을때 그런말을 들은 적이있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 성공할타입은 아니네, 가르치거나 주변일을 해야될것 같은데."

본래에도 업으로 삼기엔 부족하다 느끼고 있었기에 종종 잘그리네요 같은 칭찬의 말에 하는 대답이라곤 겸손도 포기도 뭣도 아닌말.

'낙서인데 뭘'이라는 말.

서랍 속에 넣어두기엔 아직 너무 좋아서 어설픈 웃음을 짓는다.

주인공인 성민이에게 그림은 낙서에서 애정에서 열정에서 업으로 그렇게 변해갔다.

처음엔 그도 주변 반응에 눈치보며 낙서를 숨기듯 지내는 평범한 그림쟁이에서 가정 형편으로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공대에 진학해 흐르듯 살다가 그 흐름속에 다시 그림에 마주하고 그제야 미대전과를 생각한다.

예전 그때처럼 꼭 미대를 가야겠냐는 말에 이번엔 힘주어 '나도 그림잘그려'라며 목소리를 내며 도전했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된다.

그러나 정작 그림을 그리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일을 계속 하려하는가.


넌 왜 그리는데? 그림말야, 왜 그리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네가 그리려는 이유가 뭐냐고.

<그림을 그리는 일>, 초

넌 왜 그리는데? 그림말야, 왜 그리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네가 그리려는 이유가 뭐냐고.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건

그림 그리는 데 이유가 있다는 걸까 없다는 걸까.

표출의 욕구일까, 인정의 욕구일까, 유희적 욕구일까, 그 무엇도 아니라면 동시에 지니고 있는걸까.

시종일관 체념과 고집의 그 중간 어디쯤 되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자신에게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마음가짐과 생활의 형태를 얼마나 들쑤셔 놨는지 서술한다.

이건, 정말이지 그림그리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 중 하나이자, 그러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다.

늘 느끼지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면,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사는 모습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결국 한 이야기를 맞이할때 '맞아맞아 나도 그래'라는 공감을 느끼거나 아니거나 그 둘 중 하나니까.

책을 다 읽은 후에 체증인지 먹먹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휩쌓여 있었고,

그제야 책 뒷표지를 본 나는, 추천사에 쓰여진 두가지의 난제를 그제야 확인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이 (과연) 행운 일까?"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 이책은 결국, 이 두가지의 난제를 품고 서술하고 있었구나.


그림을 그리는것도, 그만두는것도 결국 내 이야기들.

내이야기의 서술방식이자,내이야기의 연장선들.

나는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처음을 들춰보았다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종종 인생이 이렇게 외로운 것인가 생각한다.

세상에 잘난 사람은 왜 이리도 많은지, 그 사이에서 나는 또 얼마나 작은지.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던데 갈수록 작은 일에도 진심을 담기가 어렵다.

'또 작아질려 그러네.'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군중 사이에 뒤섞이며 너무나 자주 느끼는 고정적인 이 대사.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며 자신의 존재를 너무나 손쉽게 '우주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이 대사.

수십번 비교하지 말고 살자라고 얘기하면서 수백번 비교하고 난 뒤에 오는 이 대사.

아, 또 작아지려고 하네.

작구나 작아, 요만해 라며 손가락으로 표시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아.

나는 이 대사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다들 미래를 준비하듯 나 또한 그런거라고 믿었다.

자신을 증명해낼 그 한줄을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그리 게으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결국 알바 이력서 경력란 한 줄도 못 채우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다른 걸 좀 해놨더라면 지금하고는 달랐을까?

다 때가 있다고 했다. 아직 오지 않았을 거란 희망이 그림을 놓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 희망도 더 이상 나를 현실에서 떨어뜨려 주지는 못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작아졌을까.

현실의 벽은 원래 이렇게 컸었나.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고 늘 내안에 남아 빛나는 것

그건 그림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초록뱀


내게도 순수하게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누구나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열정을 붓고, 집중과 몰입의 즐거움을 알고, 다음에 또가 즐겁기만 하는 시절이. 

그러다 어느순간 '현실자각'타임이 온다.


평범한 가정, 무난한 성격, 튀지 않는 외모, 적당한 성격, 평범한 재능.

인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못하지도 않는 단계.

늘 그쯤 어딘가에 멈춰섰다.

<그림을 그리는 일>,초록뱀

이를테면 '내가 이걸 계속해서 성공할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성공타령 타임' 이랄까.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일까.

그림은 발에 차일만큼 많았고 그만큼 쉽게 잊혀졌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그림을 그리며 자기안의 무언가를 그 안에 꺼내 놓았을 거다. 그들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니까'라는 말은 나에게 답이 될 수 없었다.

내 안에 답이 없으니 좋은 작업이 나올리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찾을 수 없다고 없는 것은 아닐텐데.

그래, 그리자. 그냥 그리자.

답을 찾은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하고 싶은거 한다' 라는 건 이기적으로 살기 위한 핑계일까.

그렇다면, 그 안에서 하고싶으며 하고 사는 '나는 내내 행복한가'

그안에서 무언가를 찾았지만 늘 다시잃어버리는 느낌이 드는건 뭘까.


무언가 하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 느끼던 불안감, 그때 문득 이게 다 그림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던 일이자 그간의 삶을 통틀어 유일하게 하게 잘 하고 싶었던 일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이래서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일은 업으로 삼으면 안됀다고 했던가.

그일을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 너무나 절망적이여서.

유일한 것이 멀어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버릴까봐 그게 너무나 두려워서.

웃게 하는것도 울게 하는 것도 한가지 일이라니 웃기는 일이다.


이야기는 그림을 그리면서 진로에 확신하고 착실히 살아가던 명식이형과 '그림이든 음악이든 덕분에 즐거운 시절이 있었다는 거.'에 만족하며 다른 취업의 길로 걸어간 재훈이,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성민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다. 확신에 차 보이던 명식이 형도 어느정도 현실과 조율하고, 벗어나 보니 별거아니더라 라고 말하는 재훈이도 아쉬움은 남겨둔다. 그래서 모두에게 한번씩 공감하게 만든다.


"완성도 아닌 그림을 망칠까봐 더 못그리거나 조금 망쳤다고 다시 시작하면 다음에 또 같은 자리에서 멈추게 돼. 끝까지 가봐, 더 망쳐봐"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이 장면을 보면서 언젠가 들은 몇가지의 말들이 동시에 생각났다.

"과도하게 열중하고 지나치게 몰두하면 일도 사랑도 실패해"

"노래를 부르다 마지막에 삑사리가 나면, 사람들은 그 노래를 망쳤다고 생각해. 삑사리가 나기 전 잘 부르던 모든 순간을 뒤로하고"

"망했어" "망쳤어" 라는 말을 할때면 이런 말들이 생각나곤 했다.

거기에 이번에 이 말 한마디가 더 추가될 것 같다.


그래 뭐, 망치는게 어디있겠어. 처음부터 완성된것도 아닌데.

그냥 한번, 가보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나 이번엔 도망치는거 맞는 거 같아.'

'아냐. 도망치는게 아니라, 그냥..살아가는 거야'

<그림을 그리는 일>, 초록뱀


인생이 성공과 실패라는 두 단어로 표현되기엔 너무 단순하고 허망하다.

안정된 삶과 불안정한 삶도 그 표현 안에 속해 있고,

방황한다, 도망쳤어, 포기했어, 힘내야지, 괜찮아 라는 표현들도 그 궤도 위에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별거 아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야 라는 듯이 마지막에 내 뱉는 도망치거나 그러는게 아니야, '그냥 살아가는 거야'라는 표현이 되려 위로가 되는 거다.

'도망쳤다 같은 말에 얽매이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도망 쳤다', 가 아니라 '그만 뒀다' 단지, 그 뿐인거야.' 라는 언젠가 <수짱의 연애>에 나왔던 유치원부원장님의 대사가 생각나게 하는 이 '그냥 살아가는 거야'라는 대사는 작가의 말에서도 한번 더 언급 된다. '중요한 것은,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인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길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걷던 그 길에서 벗어 난다는 표현도 어쩌면 웃기는 표현 일 수도 있겠다. 도망친다는 표현은 더더욱 맞지 않겠구나.

끝없이 고민하고 선택하고 가지 않았던 길이나 다른 선택에 대해 돌아보며 후회하고, 그렇게 결국 선택한 대로 살아갈 뿐이지 그게 도망가거나 꿈을 저버린 행동이라고 평가하고 비난할 일은 아닌것 같다.

그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내가 하는 그 어떤 일이든.

이렇게 책 읽기는 다시 맨 끝으로 돌아와 두가지 난제를 다시 맞이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이 (과연) 행운 일까?"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두 난제에는 또 다시 울컥해 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아직 마음 속에 정리되지 않은 책을 품고 독서모임에 나갔다.

독서 모임에 나가서 읽었던 책을 소개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정말로 핵심적으로 느꼈던 부분만을 간추려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이 마지막 서술 부분에 힘 주어 말했고 그렇게 이 책을 정리했다.

'그 모든게 자연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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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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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400여쪽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놀라운_몰입도 라는 해시테그가 붙여질정도로 책을 펴는 순간부터 정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한번에 읽게된다. 400여페이지나 되는 소설인데,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본 느낌이랄까, 장면의 묘사와 인물의 대화들이 너무나 생생히 서술되어 있어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는 몰입도가 정말 대단했다. 술술술술 읽힐뿐더러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거듭되는 반전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했던 것 같다.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인생의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라는 대사속에 우리네 인생사를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라는 세가지 표현으로 밀도있게 압축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모질게, 독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살아가자는 표현을 좋아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되돌아 보건데 그 세가지의 마음가짐 중 어느것 하나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짐의 말이 아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열정의 감정의 말. 이 세가지를 파도와 함께 빗대어 표현한 저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을때 머릿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문장은 내용상 스쳐지나가던 사소한 문장이였다.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 이 곳에 남겨졌으니, 이 생에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결국 나이기에.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야한다.' 라는 말.
소설속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마음으로 내내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이 문장이, 이 소설을 내내 관통하는 핵심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이시대의 사람들은, 너는 어떻게 살고있느냐고 묻는것만 같았다.


1917년, 어진말
“버들애기씨 내년이면 열여덟이지예? 포와(하와이)로 시집가지 않을랍니꺼?”
로 시작되는 소설의 가장 첫 말.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소설의 첫 한줄, 영화의 첫장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첫줄을 읽으면서 피식 웃었다. 소설의 원칙에 아주 충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대, 주인공, 나이, 지역, 그리고 시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앞으로 펼쳐질 그 시대의 여성의 연대기 라는 것을 단 한 줄로 모두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몰입도는 이렇게 첫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 하필, 포와였을까. 왜 여성들은 사진신부가 되어 포와까지 가야 했을까.
눈길이 갔던 대목은 양쪽 다 주체성을 '빼앗겨있다' 는 점에서 닮아 있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사실 인물관계도가 가장 헷갈려서 읽으면서 옆 종이에 이름이 나오는데로 일단 받아 적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이소설은 아주 간결하게도 세 여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중에서도 [버들]로 나오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라 인물관계도를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했던 건 사실 시대적 배경지식을 얼마나 아느냐였던 것 같다.
정확한 시대 배경을 잘 몰랐던 나는, 중간 중간 녹아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검색하기도 했다.
인물이나 사건들이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어, 소설이 역사적 고증을 잘 거쳤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소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참고문헌이 기록되어 있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드라마같은 내용전개도 전개지만 이념의 갈등의 표현이 압권이였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러이러했었다고 한줄은 요약으로 알고있는 과거사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생생히 묘사되어 살아난다. 감히 그랬더랬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느낌이다. 피부에 와닿는 체험을 한것같이 이입되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세 여성으로의 연대기 외에도 이주민의 삶, 교민사회, 독립운동, 이념 갈등, 노동 현장들을 자세히 알게 될뿐만 아니라 간접 체험하듯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자세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이며 시대에 맞서고자 앞장서고자 하는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이 당돌함과 시대의 불합리성에 항거하고 나라의 어려움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 상상해서 그려진 인물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TV에서 지난 수천년의 (남성 서사 중심의) 역사속에서 과연 여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한 일들이 없었을까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것을 본적 있었다. 아니 단지,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라는 결론은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때문에 배움에 대한 열망,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주도적으로 설계하여 자유롭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그 시대의 10대 여성의 삶은 대부분 버들이나 홍주의 모습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1919년도에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부분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용되었던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는건 그녀들과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모두를 기록하지 못했고, 기록되지 못했을 뿐.

‘딸은 출가외인이 될 사람이니 어릴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던(63p), 남자가 첩을 두는 건 흉이 아니지만 과부의 재가는 흉이 되는 곳(80p)이 조선'이었다는 시대적 배경속에 결국 편승되고 꺾였을 꿈이였을테지만, 그 시대의 여성들은 분명 깨어있고 시대인식을 바꾸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으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록된 여성들의 이야기(천연희, 이희경, 한국이민사박물관)로 사회, 정체,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여성사에 대해 추측해 볼 뿐이다.

책을 읽으면, 마지막 챕터의 반전과 함께 여성들이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을 법한 부분이 바로 이름에 대한 부분이다.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이 지어지고 불려지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존재론 적인 관점에서, 이 책에서의 스스로 이름을 짓고자 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장면이였다.

하와이가 아닌 포와, 붙들이가 아닌 에스더, 진주가 아닌 펄.
그래서 인지 나중에 그녀의 딸이 "I'm Pearl." 이라고 하는 장면은 어쩐지 진한 울림을 준다.


"우리 배 타기 전에 서이서 사진 한번 박자."“



버들, 송화, 홍주의 사진
(*천연희님의 사진을 참고해서 그려봄)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떠날 날이 잡혔을 때 홍주가 말했다. 포와에 닿으면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먼 길을 함께 온 친구들과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간직하고 싶었다. 셋은 사진관으로 갔다.

(가짜인)꽃다발, (기생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부채, (무난한) 양산. 가짜라 탐탁지 않았던 꽃다발도 사진 속에선 진짜 같아 보였을 그 사진속에는 아직은 애기같았을 송화, 우직한 버들, 경험이 많아 대범하고 꾸밀 줄 알았던 홍주가 있었다.

세 사람은 5월의 신부가 되어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 그러니까 누구댁, 누구 엄마가 되기 전 온전히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순간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어 남겼다.

그리고 그 뒤로도 기념이 되는 몇장의 사진들을 남기며 자신들의 삶의 연대기를 기록했다.
(그 사진들이 담긴 상자는 후에 판도라의 상자가 된다.)

앞서 언급했던 여성사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기에, 독립운동가들이 거사를 치르기전에 남기던 사진처럼 이 세사람의 사진이 결연하게 느껴졌다. 천연희님의 사진이 그시대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니 이들이 사진찍는 모습이 무척이나 찡하게 와 닿았다.


"고마, 퍼뜩 일나소. 지 손도 놓칠 깁니꺼?"
버들의 걸크러쉬 장면과 버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들.
버들은 낯선 땅에 갈때도, 그곳에서 마음을 둘때도, 마음을 두고 살아갈때도 내내 따뜻했다.
얼마나 애를쓰고, 얼마나 힘쓰고, 원망하고, 분해하고, 난리도 아니였던 그야말로 어느 한가지도 쉬운게 없었던 삶의 파도 속에서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스도록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이 버들이였다.

그녀들이 키운 자녀들이 후에 자신의 부모세대를 부끄러워해야 할지,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지 헷갈려 하더라 할지라도 그녀들은 치열하게 그 시대의 파도를 넘어온 것이다.

'내는 여까지 오는 것만도 벅차게 왔다.
인자는 니가 꿈꾸는 시상 찾아가 내보다 멀리 훨훨 날아가그레이.
그리고 니 이름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그라.'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마지막장

버들은 편안하고 환한 얼굴로 자식에게 얘기해준다.
자식은 온 생에 꿈을 꾸고, 찾고, 쫓아온 세 엄마들의 생을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가 이제껏 매순간,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그 마음을 알게된다.
펄은 웃으며 내리는 비를 피하지도 않고, 다가오는 파도를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어느 한가지도 쉬운게 없었다.

파도는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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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해결사 깜냥 1 - 아파트의 평화를 지켜라! 고양이 해결사 깜냥 1
홍민정 지음, 김재희 그림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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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떠돌이생활 2년차 길고양이 깜냥이는 의뭉스럽고 능청맞으며 도도한 캐릭터이다.
까만색 털을 가진 고양이라서 이름이 깜냥이 이지만,
'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릴 수 있는 능력' 이라는 뜻의 '깜냥'이라는 단어의 뜻을 품고 있어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굉장히 사회적이고 독립적인 고양이로 묘사되는 깜냥과 어울리는 사람들의 대화는 원래 부터 동물과 인간이 대화가 가능한것 처럼 자연스러워 매우 동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은 경비아저씨, 택배아저씨, 아파트 주민 몇 명이다. 동화의 특성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

깜냥의 눈으로 관찰된 세상은, 동화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깜냥이 만나는 인물들은 각자의 사연과 생활이 있고,
그들의 생활과 잠시 맞닿게 된 깜냥이는 그들의 곁에서 함께 있어 준다. 그 또한 잠시지만, 깜냥이는 그들에게 그 시간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감사함에 대한 소소한 표현들이 깜냥이를 고양이 경비원으로 있게 해 준다.

따뜻함을 나눠주는 깜냥이의 말투는 '원래~하지만' 이다.
원래 아무거나 안먹지만 먹어주고,
원래 아무데서나 안자지만 잠을 자주고,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돌봐주고,
원래 책을 보거나 춤을 추지 않지만 해주고,
이렇게 원래라면 해주지 않는다는 도도한 고양이의 특성은 츤데레 기질을 발휘하며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준다. 눈치가 빠르고, 기본적으로는 다정함을 품고 있는 깜냥이만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주민들의 민원에 식사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경비 '할아버지'의 묘사는 어른이 읽기엔 너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동화에서 조금 빗겨나 현실의 경비원의 노동실태에 대한 현실적인 몇몇 기사들만 찾아보아도 참담하다. 그리고 그건 택배 기사도 마찬가지다.
경비아저씨의 부재로 아파트 입구로 진입못한채로 짐을 옮기기 시작하는 모습에서부터, 수많은 짐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모습, 그리고 이유없는 항의와 불만, 고된 노동환경까지.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되, 고양이의 시각에서 '본'것만 관찰자의 시점으로 동화적으로 푼다. 어른의 입장에서 읽어서 현실을 풍자한 동화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어린이가 읽는다면, 묘사된 몇 구절들을 보면서 그들의 고됨을 알고 적어도 앞으로 자신이 마주할 경비아저씨와 택배아저씨에게 상냥한 얼굴로 인사하는 어린이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깜냥이가 만나게 되는 또다른 인물들. 바로, 어린이들이다. 201호 아이들과 602호 아이.
이 두 집의 부모님의 부재로 아이 혼자 집에 남겨져 있다는 공통된 특징으로, 맞벌이 부부들의 삶과, 혼자 지내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이들은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과자를 먹기도 하고, 춤 등의 기타 취미생활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들도 요즘 사회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깜냥은 주민과 경비원에게 피해를 주는 '장난'을 치거나 '층간 소음'을 내는 아이들에게 한소리 해주려고 다가갔었지만,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의 외로움 알게되고 그들에게 함부로 충고나 가르침을 주지 않고 함께 어울리며 잠시나마 외로움을 달래준다. 아이들의 놀이에, 그저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깜냥의 모습은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부모님과 조금 더 함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조용히 시사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디를 가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
"뭐, 고양이'도' 싫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깜냥이는 인간 사회를 안다. 관계가 마냥 좋을 수도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사랑 받기위해 애쓰지 않는다. 싫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 이니까.
개인적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도도하게 내뱉는 저 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저런 태도야 말로 매우 고양이스럽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깜냥이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참 많다."고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슬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사람을 자신이 직접 만나보았기 때문에, 그런 좋은 점들을 깜냥이는 베풀줄도 안다.

"오늘은 어디로 가니?"
"몰라요, 원래 어디로 갈지 미리 정해놓지 않거든요."
"정해 놓은 곳이 없다면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소리잖아"

이 부분도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 라는 먼 미래의 계획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무얼 할꺼니, 라는 당장의 계획을 물어보는 경비아저씨도 좋았고,
"미리 정해놓지 않아요" 라는 여유가 있는 대답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함께 하자"라는 권유의 대화도 좋았다.

창비 어린이 책 수상작으로, 동화적이면서도 사회의 이면을 잘 묘사하여 시사하는 바도 큰 고양이 해결사 깜냥.
앞으로 경비원 외에 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시리즈로 계속 찾아오게 될 깜냥이 너무나 기대된다.

#창비#창비서평단#창비좋은어린이책#고양이깜냥#고양이해결사깜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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