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닝 창비만화도서관 3
틸리 월든 지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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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월든의 『스피닝』(Spinning)은 작가가 12년 동안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지내다 그만 둔지 몇년이 되지 않은 21살 때 쓰고 그린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이사, 전학, 학교생활 과 선수생활, 따돌림, 경쟁, 코치와의 조화, 가족의 부진한 지지, 첫사랑, 커밍 아웃 등의 혼란스러운 성장기의 고민의 흔적들을 담담한 어체로 기술하면서 누구에게나 있었을법한 흔들리던 시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피겨스케이팅 기술 중 '스핀'이라는 것이 있다. 회전력을 얻으면 빨라지지만, 어느시점에 다시 속도를 낮춰 돌아와야 하는지 모르는 삶의 휘청거림은 어지러운 청소년기를 닮았다. 자전적 이야기와 그 시절을 펼쳐 놓은『스피닝』의 틸리를 보면서, 틸리의 사람의 흔들림과 나약함과, 그럼에도 용기를 보면서 우리는 틸리의 '기억'에 대한 회고록을 보는것이 아니라 '느낌'들을 함께 느낀다. 한때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무언가가 있는가를 묻는다. 매일 똑같이 반복하고, 연습하고, 경쟁하고, 일상 생활패턴의 기준이 되었던 스케이트를 대하던 감정선을 따라가면 틸리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기도 하다가도 위로를 받기도 한다. 세상의 전부와 다름없는 공간에서, 나를 아껴 줄 누군가를, 애정을 줄, 온전히 나를 받아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

'점프에 실패하는 건 점프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점프의 성공은 다만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달려 있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질문의 답을 결정했다.' 라며 오래도록 내면의 재워두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깨웠을때는 용기를 얻었을때 보다 대부분의 것들을 잃었을 때였다. 때문에 '이제는 링크 밖으로 나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벽장 밖으로도.' 라며 빛을 잃은 '전부' 였던 것을 놓아두는 장면은 의외로 담백했다. 치열했던 어떤 것과의 이별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지녔었던 우리에게도 그때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성장담'의 한페이지도 함께 완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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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답장 창비만화도서관 8
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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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지내, 너는 어떻기 지내는지 모르겠다. 이 편지는 뒤늦은 답장이자, 초대장이야. 왜 이제야 답장할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어. 난 이제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어."

『뒤늦은 답장』은 주인공 남우가 친구 재근에게 보내는 200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었던 '그때'의 일에 대한 답장이다.

수능 준비는 뒷전이고 영화 동아리 활동에만 열심히였던 남우, 단 둘이 살면서도 최선을 다해 엄마를 외면했던 남우, 그런 엄마에게 엄마도 모든게 '처음'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남우, 돌연 화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재근을 좋아했지만 연민은 싫었던 남우, 때로 각별했던 사이의 사람과 영영 만나지 못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함께했던 시절을 완성하기 위해 보내는 뒤늦은 답장을보내는 남우까지.

남우의 복합적인 감정과는 달리 담담한 그림체와 서정적인 묘사로 남우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공감하면서도, 그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네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아마 그리울 거야."라며 지난 시절을 가만히 돌이키며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다. 그때는 그 복잡하고도 처음 겪는 마음 속을 제대로 살피려 하지 못했고,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시간의 흐름 속에 자그대로 숨겨두고 말았지만, 이제야 보내는 그시절에 대한 환기와 답장은 나지막이 환기하는 『뒤늦은 답장』은 그때의 나를 '이해'하게 한다. 그땐 말이야, 그랬던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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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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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여름, 13살의 해원이 주인공인 『열세살의 여름』이라는 첫번째 책을 읽게되었다. 주인공이 가족끼리 여름 휴가로 떠났던 바닷가에서 겪은 '작은 추억'을 하나 가지고 여름방학을 마치면서 시작한다. '바다에서, '누구' 봤다.' 라고 짧은 한줄로 설명되지만, 볼이 빨개지며 두근거렸던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시간의 배경을 결코 짧은 설명으로 대신할 순 없을 것이다.

'어린시절에는 '연애'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에 그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게 우선이었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에 겪었던 비슷한 일들에 가끔씩 부딪힐때마다 열세살의 자신이 어떻게 그 순간을 지나왔을지를 떠올리며 용기를 얻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 떠도는 어떤 마음은, 어떤 괴로움은, 때때로 외면하기에 바빠서, 마주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어린 마음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마음이지만, 집요하게 왜 거기 있느냐고,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따져봐야 거기서 배우게 된다'는 그 말은 '경험'이 안겨주는 소중한 '성장'일테니까.

인간은 '성장'하고, 계절은 '순환'한다. 아마 우리는 저마다 '계절'이 바뀌었구나를 인지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옷차람이나 바뀌는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아 이렇게 시간이 또 흘러갔구나.
나는 이계절, 이시기에 누구를 만났었고, 누구와 연락이 끊기게 되었더라 하는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하면 그렇게 또 나이가 들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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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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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베스트 셀러다.

작년에 내내 들리는 책방마다 1위에 머물러있던 책이었다는걸 안다. 그럼에도 손이가지 않은건 '과학'분야에 있던 도서였기 때문에.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 끝까지 스스로 찾진 않았을 책이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과학'책이라는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큰 두가지 줄기를 띈다.

첫번째 줄기는 한 과학자(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전기문(위인전)'의 형태이자 '과학적 모험담'적인 성격을 띈다. 스탠퍼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19세기의 분류학자(생물학)인 그의 일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평전'이라고 볼 수 있다.

두번째 줄기는 그를 탐구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회고록'적인 성격을 띈다. 작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탐구하는 '자서전'이자 '에세이'면서도, 과학적으로 반문하고 접근하는 자신만의 '탐구 연구서'이다.

자연과학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비판과 의견을 담은 책이기도 해서, 역시 '자연과학 교양서적'인가 하다가도, '심리학'적 접근과 '철학'적 접근도 상당히 갖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철학책인가 하는 생각이 넘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이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읽을 수록 "아니 도대체 과학도서에서 추리소설에나 쓸 수 있을법한 '반전'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한다는 점이다. 중반부 지나가도록 '가나다'를 배우다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갑자기 사회비판적인 '랩'을 쏟아내는 듯한 구성과 필력은 다 읽고난 후에 파도가 휩쓸고 간듯한 신기한 경험을 가져다준다.


01

문득 그럴 때가 있다. 나는 흘러가는대로 살고있구나, 싶어서 잠시 멈춰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걸까" 라는 생각 들때. 이런 의문은, 현재에만 적용되는 의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할까. 뭘 해야 내 삶에 가치가 있을까. 내 삶의 의미는 뭘까."로 확장되는 의문이다. 그래서 곁에있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그런데 이런 딸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의미는 없어!"라는 대답을 하는 아버지. 딸에게 이 기억은 매우 강렬하게 남는다.


02

'실재'하는 세상에는 모든 이름이 있고, 범주가 있고, 질서가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혼돈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일뿐, 세상은 '혼돈' 뿐이라는 말은 그 모든 자연과 생명의 '질서'에 대항하는 대답이였다.

그러나 그 질서라는 것이 사실 자연스러운이 아니라 작위적이고 인위적인것이라면 어떠한가. 아버지는 '종교 중심'적 사고로 신의 존재를 맹신하는 사람과,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으며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 중심'적인 사람들 모두를 비판하고자 하는것은 아닌가. 그런사고에 휩쓸려 각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중요도'와 '순위', '쓸모', '구원'을 논하는 것이 진정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인가.

이 세상엔 신도 없고, 운명도 없고, 계획도 없어.

우리 (이승의) 삶에 의미는 없어

때문에 내세(저승의) 삶도 없지.


넌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너 좋을대로 살아.

'혼돈'은 거기에 있을뿐,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무엇에도 관심없다. 꿈, 의도, 특별하다 여기는 가치와 사고, 행동, 그 무엇에도.

개인적인 읽기로는 아버지의 말이 매정하게 들리진 않았었다. 다만 어린딸에게 할 말이었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을뿐. 이 부분에 대해 독서모임에서 첫번째 의견을 나누었다.


"아버지, 이책은 아버지를 위한 책이에요"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나이 지극한 성인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말에 해명하듯, 대앙하듯, 투정부리듯 뒤늦게 대답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있다. "아버지, 전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죠? 아니예요! 전 중요해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요."


03

철학에는 어떤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있다. 그것들의 '이름'이 만들어질때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발견'하고 바라봐주는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야기고, 나아가 그 존재와의 '인연'이 단발성이 아니라 계속성을 띄어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 '앞으로' '무엇'을 무엇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 모든 명명은 사람과의 '관계맺기' 약속이다.

이부분에서 자연스럽게 김춘수의 '꽃'을 떠올릴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꽃이되었고 의미가 되었다는 서사를.

그리고 두번째론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떠올렸다. '이것'이라는 글자가 파이프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고, 가리킨다해도 '파이프'는 실재의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이고, 모든 나라에서는 각각의 언어를 쓰기 때문에 이것을 파이프라 '부르지' 않을수 도 있다.

이것은 명명과 존재, 실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이름 붙여주지 않아도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이쯤 읽었을때 들었던 생각은, 아아.『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물고기'라는 명명이 실재 물고기(들)을 하나하나 지칭 할순 없으니, 이건 명명과 관계맺기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담긴 책인가보다, 했다.

정말로 '물고기'라는 <어류>가 분류학적으로 존재할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철저한 과학책의 성격을 아직은 잘 보여주지 않은것이다.


05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민들레'라는 풀은 잡초일 수도 있고 약초일 수도 있다. 꽃가루가 날리며 알러지를 유발하는 유해한 존재일 수도 있고, 구석구석 꿋꿋하게 피어나는 불굴의 상징일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민들레의 원칙'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대성과 다양성을 경험으로 느낀다.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라는 새옹의 말처럼, 인간만사는 새옹지마이다. 득실과 화복은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그때는 맞는 것이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사실 잡초이건 약초이건 민들레는 민들레로 있을 뿐이다. '꽃이 져도, 씨가 맺혀도, 바람이 불어 그 씨가 휘익 날아가도 민들레는 민들레.'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명명과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미 이전에 '존재' 가 있다. 이름, 분류, 종류, 서열, 의미, 이런것들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이 책은 계속 그런것들을 얘기한다.

우울한 삶의 와중에 우연히 알게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당시 알려진 어류의 ⅕이나 직접 물고기를 발견하여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명명하며 수집한 수많은 표본들이 화재(벼락)와 지진으로 파괴되는 경험에도 굴하지않고 혼돈에 맞서 싸우는 모습에 매혹되어 그의 삶을 추적해나가며 ‘물고기는(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그의 이 무모한 열정이 자신의 우울함이라는 역경의 시간을 헤치고 끝내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줄 교훈이 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가 그에대해 연구하며 알아낸 것들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펼쳐진다.

명명하기 위해 수집하게 되고, 그 수집과정은 무자비했으며, 분류하고 순위 정하기가 되어, 그 끝은 우수함과 열등함을 믿게 하여 장애인, 성소수자, 부적합자를 '제외'하여 가장 우수한 종만을 남기기 위해 '인간의 분류', 가장 위험했던 범주, <우생학>으로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녀가 기대했던 그의 '업적'은 그런것들이 아니었으리라. 명명, 분류, 순위, 우열. 그 '범주'에는 '다양성'과 '다름', '존재'는 없었다.

이 책은 분기학자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 영향을 받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업적에 대해 다시 논해보는 책이다.

<분기학>은 종은 사다리 타기가 아니라 '진화'하며 얻은 새로운 특징들로 계통학적 '유연함'을 알아내는 학문이다. 분기학에 의하면, '물' 속에 살아 '아가미'가 있고 '비늘'이 있다는 특징으로 만들어진 <어류>라는 범주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 분류이며, 오히려 심장이나 폐, 뼈 등의 구조등의 특징들을 비교하다보면 다른 종과의 유사성이 많다는 것이다.

물속과 비늘이라는 장소나 생김새로 단순한 특징을 내세워 종을 묶는 오류를 다른것에도 적용해보자. 색이라는 특징으로 묶으면 우리가 흔히 아는 원숭이(엉덩이는 빨개)와 (빨가면) 사과는 같은 종인가. 바나나처럼 긴 기린(목이김)과 뱀(몸이김), 홍학(다리가김)을 같은 종이라 묶는다면 어떠한가. 이것이 범주의 오류이다.

그렇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물고기들을 묶어둔 <어류>라는 범주는 사실 없다는 결론.


06

성장한다는건 다른사람들의 말을

더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오직 인간만이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자기 편을 만들고, 내것을 만들어 '목표'와 '의미'를 찾아 헤매며 산다. 자기연민, 자기확신, 자기기만, 긍정적인 착각 속에 빠져 많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무엇을 위해', '그 다음은'을 외치며 살아간다.

그렇게 맺어가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오명과 오진과 오류를 받고 범한다.

'혼돈'은 무질서가 아니였다.

'옳음'이라는 '믿음', '확신'에 대한 '의심'이다.

때문에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성장한다는 건 '무조건'이라는 말에서 벗어나는 거야" 라는 말이 좋았다.


07

명명, 순위와 우열의 사다리, 선과 악, 옳고 그름, 주류와 비주류, 관습과 도덕성,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우리의 잘못된 범주의 오류가. 또 어디에 있을까. 아니, 어디에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더 오래 검토할수록,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민들레의 원칙'처럼 "잡초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때, 나는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얻었다.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 라는 맺음말이 좋았다.

물고기를 선택한 남자의 삶을 쫓아 나도 함께 구원을 얻으려했으나 구원을 물고기를 쫓는것에 있지 않았다. 물고기를 포기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08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저자는 자신이 이성애자의 범주에 속해있다고 알며 살아오던 삶에서 이성과 동성아라는 범주 안에 속하지 못하는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았을때 괴로워했다. 그러나 글의 끝에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서 그녀의 괴로움이 치유되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 글이 '양성애자'인 자신을 항변하기위한 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분기학'의 프레임과 함께 자기 보호적인 글을 쓴것이 아니냐고. 그럴수도 있겠다.

우리 삶에 의미는 없다고, 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아빠 보세요,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누구이건, 내 존재를 인정해주세요. '나란 존재'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해요! 항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나'보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 아니 그 속에서도 작고 적은 '범주' 속에 묶여있는 '존엄'한 사람에 대해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싶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우생학, 사형제도, 성소수자, 장애인, 요즘 발생하고있는 무차별 살인예고자 등 사회에서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는 '비정상'과 '부적합'에 대해 논했다. 그러다보면 사회적 '쓸모'와 '생산성'과도 이어졌고 '포용'과 '상생'과도 이어졌다. 결론이 나지 않는 얘기들이였지만 '모두 함께','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뜨겁게 논쟁했다.

우리는 의미와 가치부여 이전의 '존재함'을, 부여한 후에라도 얻게되는 '다양성'에대해 얼마만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나.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만큼 '중요한' 일인가.


09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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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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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도발적인 책을 썼던 김지혜 교수가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는 당신을 심란하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가족각본』이라는 두번재 책을 선보였다. 그리고 때마침 열렸던 북토크에도 다녀왔다. 책을 읽기 전이였는데, 강의를 다듣고 책을 보니, 책의 내용 순서에 따라 강의내용을 진행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큰 줄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가족'형성에 공식이 있는가,

'가족'형태는 같아야 하는가,

'가족'형제는 부양해야 하는가


'가족'은 견고한 '각본'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태어나면서 부터 역할을 기대 받거나,

성인이 되어 가족을 만들면서 역할을 맡는다.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아들과 딸' 등 역할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역할에 맞는 각본에 따라 '~답게' 행동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정해진 '각본대로' 따르는 걸 '평범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평범'이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을 말하는 것.


'관습' 이란 글자에서 살짝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직도 '소수'이고 '개인적'인 일로 여겨지는 '동성애(성소수자), 미혼자녀, 고아, 미망인, 장애인, 노숙인, 저소득인' 등이 무대에 등장하게 될 때이다. 이때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족각본에 관습적 역할이 꼬이게 된다.

이책은 '익숙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라는 '질문하기'가 전제이기 때문에, 정말 수많은 질문 폭탄을 던진다.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한번 답해보길 바란다."는 듯이.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가족안에서 역할은 왜 성별로 규정될까? 애초에 역할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왜 당연히 결혼과 출산을 하나로 여기는 걸까? 왜 비혼출산은 비적법한 출생, 비정상가족형태가 되어 당연한 듯 차별당하는 걸까? 부모는 모두 있어야 할까? 가부장제는 왜 이토록 오래도록 연명하고 있는걸까? 가족은 개인의 생존을 책임지는 단위여야 하는가?

이 책은 질문의 질문을 거듭하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던 '관습'에 반대되는 질문을 던지며 당혹감을 주고, 우리도 모르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있었던 차별성을 드러내고, 은근하게 자리잡고 있던 '평균 기준'의 이기적인 편향성을 들춰낸다.

우리는 위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가족(家族)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부부 '인연', 부모 자식의 '혈연'과 '입양' 으로 연결된 일정 범위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가리킨다. 현행 「민법」 제779조의 가족의 '범위'를 살펴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배우자', '형제자매', '직계혈족' (부모와 자녀)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자기'는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families)의 어원인 라틴어 familia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familia는 '가장'에게 속한 '소유물'인 아내, 자식, 노예 등을 뜻했다고 한다. 가족의 시작은 오늘날처럼 공동체 단위가 아닌 엘리트 계층의 소유물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가족을 구성하는 원리는 동서를 막론하고 남성을 주축으로 한 '가부장제'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시작은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2007년 동성애 허용법안 반대시위 구호부터 시작되는데, 그 초첨을 '며느리가 왜 남자면 안돼나요' 가 아니라, 왜 '며느리'부터 들먹이느냐로 시작된다. 이는 두가지 관습을 동시에 흔드는 질문이다. 가족형성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가부장제' 와 그 뿌리를 흔드는 '동성애'.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 질서가 뿌리깊게 남아 있음을 일깨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결혼'이란 참 오묘한 일이다. '스드메', '청첩장과 식장', '신혼여행'이라는 성대한 예식을 치는 기간과 비용에 비해, 법적인 신고 절차는 초라하다. 단출한 서류작성하나가 끝이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능력을 묻는 절차도 없다. 그 간단한 서류 하나로 '서류상'으로 가족이 되면, 당사자들 사이에 '권리'와 '의무'가 생긴다.

①'동거'하여

②서로를 '부양'하고 '협조'해야 한다.

③서로를 '대신(대리)'해 공동생활에 관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④'재무(채무)'에 대한 책임도 공동(연대)으로 진다.

⑤결혼중 협력해 모은 재산은 명의와 상관없이 '공동재산'이 되고(해체시 분배대상)

⑥공동재산 분배시 '가사노동'을 분담한 기여도 인정된다.

⑦'보호자'로서 각종 동의와 결정(수술,연명 의료 중단 등)을 내리기도 하고

⑧'배우자'로서 '사회보장급여'를 받고

⑨'유족'으로서 상대가 사망시 장례를 치른다.


의무와 동시에 권리가 생기는 결혼을 사람들은 '거래'라 여기며 가족 형성을 통해 유리한 경제적 지위를 얻으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결혼 기준으로 학력, 외모(특히 키), 직업, 연소득과 기본자산을 기본으로 비교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178cm의 연소득 6천의 공사직 남자가 163cm의 연소득 4천의 사무직 여자를 만나 5억정도의 자산으로 시작하는게 결혼이다. 기준치가 높아지면서 동질혼이 많아졌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과거보다 더 평등해진것 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결혼 후의 일자리 변화(경력단절, 전업주부)와 동질혼 계급의 재생산(양육자까리의 배타접 집단형성)과 불평등 강화의 효과 등을 보면 과연 정말로 평등으로 나아가는 지는 의문이다.


있는 자가 가족제도를 통해 계층을 세습하는 동안

없는 자는 가족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지금처럼 사회가 급변하고 가족의 불안정성이 커지는 시대에

축적된 재산이 얼마나 많아야

'가족'이라는 '소박한 행복'을 꿈꿀 수 있을까?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결혼생활 어때?"는 잠시, "아이는 언제 낳을 거야?"라는 질문이 바로 이어진다. 이렇듯 결혼은 출산을 기반으로 한다는건 결혼 밖에서 출산하면 안된다는 뜻도 있다.

그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① "아이를 낳지 않을거면 왜 결혼했냐" 비난받아야 하고, 역으로 ② "아이가 생겼다면 책임져야(서둘러 결혼) 한다" 라는 공식에 부딪혀 비혼 출산을 부정 당해야 하며, ③"동성커플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 할 수 없다"라는 반대에 부딪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출생은 완전 무결한 필요충분 공식이며 결혼은 출생을 위한 자격이 되는 것인가,

출산의 기반인 결혼을 해체시키는 ①②③의 '변형' 들은 '사회적 재앙'인가.

결혼 하지도 않고 아이를 낳은 사람은, 혼 외 출산은 '문란함'으로 낙인찍혀야 하는가.

출산이 '애국'이라면,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에게 국가가 간섭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녀 출산에 대한 부담이 적은, '동거'와 같은 결혼 외의 가족 형성은 '공동생활'로서 보호 받을 수 있는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돌봄의 공동체를

국가와 사회가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일까?


혈족 안에서 사람들의 순서를 매기고, 출산의 공식을 지고, 부양의 의무를 부과해, 생존을 담보로 해온 지금까지의 가족은 자유와 평등을 근본가치로 지향하는 현대사회에서도 계속해서 적용되어야 하는 '질서'로 남겨져야 하는 걸까. 강요된 의무와 위계적 압박이 사라질때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서로를 돌보는 길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가족을 이루는가.

현행 「헌법」 제 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가족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도록 국가는 이를 보장하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며 더 '다양성'을 바탕을 둔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가족은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개인의 운명이나 운으로 가족생활의 불평등함과 차별을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헌법에서는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 생활' 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해 두고 있다.

'제도'를 바꾸는 것은 '구체적인 사례' 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개인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보장'과 '국가적 책임'이 뒷받침되어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바뀌어가는 제도와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정 변할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있다는 것은 다양한 삶의 형태와 가족의 형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는 아직, '사회가 변하고 있다'에서의 '변화'를 '위기'나 '해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관습에 대항하며 해체해! 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의 '확장' 을 외치는 것이고, 기존의 사각 지대를 발견하여 '추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가장 좋았다.

변화가 꼭 위기와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옳았던 것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범위를 더 넓힐 뿐이다.

'아니야, 틀려'가 아니라, 이런 모습 '도' 있어, 라며 바뀌어가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어떠한 변화가, 다른 목소리가, 다른 형태가 모두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왜' 이런 변화가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며 그에 맞게 대안찾기에 힘쓰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변화와 다양성의 담론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들게 한다.


오랫동안 '개인'만의 책임으로 물어왔던 것에 대해, 정말로 그러한가를 되묻는다면, '돌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돌봄'은 사회에서 공동의 책임이고 '개인'의 권리이다. 다양성을 인정한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면서 각각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와 열린 마음이 필요한 때이다.


'가족' 불평등이 문제라면, 가족의 형성과 역할 분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각본'을 다시 써볼때가 되지 않았나 제안하는 책이다.

가족은 국가 발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돌봄'을 주고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 로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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