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달리는 아이
제리 스피넬리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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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발 디딜 곳 없어 하늘에 기댄 아이 제프리 머기.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니악 머기'라 부른다. 집도 가족도 없는 혈혈단신, 꼬질꼬질한 백인 아이가 겁도 없이 헥터가에 나타났다.


 《하늘을 달리는 아이》 속 헥터가는 이스트엔드와 웨스트엔드의 정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에 엉킨 실타래라면 뭐든 순식간에 풀어내고, 공 던지기와 달리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머기의 출현으로 마을의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가장 먼저 만난 '아만다'와의 인연으로 머기는 이스트엔드에 발을 디뎌 놓았다. 자연스럽게 한 집에서 지내게 된 마니악의 명성은 흑인 마을 이스트엔드 전역에 퍼졌다. '새로 태어난 백인 아이. 시카모어가 728번지의 아만다 가족과 사는 아이.'
마니악은 자신의 피부가 흰색이 아닌데 왜 백인이라 부르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피부색이 왜? 검은색? 흰색? 난 흰색이 아닌데? 당신도 검은색은 아닌데?

 

"마니악은 이스트엔드의 색, 사람들의 피부색을 사랑했다.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왜 이스트엔드 서람들이 스스로를 검다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지만, 그가 발견한 색은 생강 쿠키, 밝은 퍼지, 짙은 퍼지, 도토리, 버터 럼주, 그을린 오렌지색 등이었다."


검은색의 정반대 색이 있다면 흰색일까?
편견이라곤 1도 없는 마니악은 도대체 어느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 숲속에서 동물들의 손에 키워지기라도 한 걸까? (머기에 관한 비밀은 이야기 말미에 밝혀지는데 정말 충격적이다.)

 

마니악은 아만다 가족과 지낸지 머지않아 또 다른 가족을 맞이한다. 동물원 관리인 그레이슨이 그랬고, 웨스트엔드에 사는 피크웰 가족 또한 마니악의 가족이었다. 그는 어딜 가나 사랑받았고 행복을 누리는 듯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큰 구멍이 나있는 듯 헛헛해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걸까? 그것도 겨우 십 대인 어린아이가.

 

소설 속 백인과 흑인은 동과 서로 나뉘어 전혀 교류가 없다. '서로에 대해 모르게 될수록 오해는 더욱 깊어진다.' 정반대인 듯하지만 동과 서를 선으로 이으면 평행선인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마니악은 둘을 잇기 위해 애쓴다. 아니, 실은 이미 하나의 줄로 이어져있다. 그저 엉켜있을 뿐.

 

"코블의 매듭은 벌집처럼 얽혔을 뿐 아니라 밖에 걸려 있던 일 년 동안 비바람을 맞아서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가닥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더럽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딱딱했다. 고리는 여기저기 삐져나왔는데, 손가락을 걸어도 될 크기인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시도했다 실패한 도전자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안쓰러운 증거이기도 했다. 바로 그곳에, 매듭을 돌리며 살펴보는 마니악이 있었다."

 

마니악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오해를 풀기 위해 나름 노력해보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상처가 깊고 클수록 치료해 줄 수 있는 많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데 아이의 손은 너무 작고 여렸다. 작고 여린 손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 애쓰는 동안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나 돌이켜보니 낯이 뜨겁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한 가지 희망적인 건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세상 속 치열한 땅따먹기 게임에서 패해 하늘을 달릴 수밖에 없는 머기가 땅 위에서 자유롭게 달리는 그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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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버그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맷 매카시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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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어력이 없는 이들을 방어해준다."

 

 

 


 암이나 뇌, 심장질환 치료의 눈부신 발전과 달리 항생제 개발은 더디기만 하다. "최초의 박테리아 유전체의 염기서열이 밝혀진 지 10년이 지나도록 유전자 접근법으로 개발된 신약은 단 하나도 없"었다. 기존의 항생제도 분자들을 나누고 쪼갠 다음 발효, 이온화, 재조립, 정제의 과정을 거쳐 성분을 재배열해 효능을 더 강화할 수 있다.

제약회사가 항생제를 개발하지 않는 까닭은 어떤 항생제든 초기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박테리아가 내성이 생기고 약효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래서 더 필요한데 제약회사와 환자의 이해는 정반대다.) 학자들은 기존의 항생제로도 치료되지 않는 변이된 박테리아를 '슈퍼버그'라고 부르는데, 이 슈퍼버그가 근래에 와선 점점 똑똑해지고 적응력이 강해지고 있다.

"항생제 과용은 슈퍼버그의 발달을 촉진하고 있고 의사 대부분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열이 나고 혈압이 급강하하는 환자를 보면서 항생제를 쓰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생각보다 자주 환자들의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 《슈퍼버그》의 저자 맷 매카시는 적절한 항생제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게 되고 환자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 항생제 임상시험에 뛰어들었다.


 


'달바'는 1980년대 인도의 흙에서 발견한 박테리아에서 추출한 큰 분자 A40926에서 시작되었다. 화학자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자에 여러 원소를 더하고 빼 보며 연구, 설계해 '달바'라는 강력한 항생제를 만들어냈다. (자세한 분해, 결합 과정 및 설명은 책 42쪽에.)

매카시는 피부 감염을 일으킨 변종 박테리아를 잡기 위해 '달바' 항생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아무리 좋다 해도 막상 생명체에 투입하면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임상시험까지 가는 길에도 병원을 설득하고, 기관의 허가(IRB(임상시험심사위원회),FDA(미국식품의약국)), 제약회사의 투자를 얻어내는 등 넘어야 할 산은 첩첩산중이었다.

"사망률이 80%에 육박하는데 이 약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것입니다."

매카시는  어렵게 (그리고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은 끝에) 임상시험을 해도 좋단 허가를 받았다. 이제 이 임상시험 대상자들을 찾기만 하면 된다. 좋은 점은 환자가 제 발로 병원에 온다는 것. 하지만 임상시험에 적합한 환자를 추려야 하는데 피부를 통해 박테리아에 감염되는 경우는 (다른 질병에 비해) 드물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환자의 상태가 임상시험에 적합해도 환자를 설득하지 못해 까이는 일도 흔하다.

 

《슈퍼버그》 엔 그가 만난 임상시험 대상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생체 실험 피해자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루스는 모기에 물리면서 세균에 감염돼 하루 만에 폐까지 퍼져 그를 만났다. 세계대전 시기 뉴기니에서 있었던 일본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지는 그곳에서 온갖 열대성 감염을 겪으며 결벽증 환자가 되었지만 MRSA(황색포도구균)에 걸려 달바를 투약 받았다. 31세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어윈은 교통사고로 대퇴골이 골절되어 수술했지만 수술 부위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해 의사가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처방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슈퍼버그》에는 매카시 외에도 그가 만난 저명한 과학자, 의사들이 여럿 나온다. 그중 빈센트 피셰티는 수십 년 동안 '리신'의 효능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닉슨 대통령이 재임하기 전부터 시작된 긴 연구 끝에 2001년 동물 실험으로 효과를 입증했다. 연쇄상구균 1,000만 개에 노출된 쥐에 리신을 투여, 두 시간 만에 균이 사라졌다. 이런 놀라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제약회사들은 광범위 치료제가 아니란 이유로 투자를 주저했고, 결국 콘트라펙트라는 제약사에 권리를 넘겼다. 리신은 2016년(!)에 들어서야 임상시험을 통과했다.

의학에 매료된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있었기에 일류 연구소가 설립됐고 피셰티같은 천재들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아 여러 세대에 유용할 과학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바턴을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이어받아 의학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아낌없이 하고 있다. 하지만 이걸론 부족하다.

흙에서 나온 박테리아의 99%가 실험식 배지에서 자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페트리 접시에서 자랄 수 있는 1% 미생물만 연구되고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모르는, 현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할 박테리아가 세상에 무수히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막강해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균들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아는 것,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코로나19는 어떨까? 어제, 미국 제약사에서 #코로나19백신 이 첫 생산에 들어갔단 소식을 들었다. 임상시험을 4월까지 완료하고 안정성과 면역반응을 확인해 이상이 없으면 6~8개월 뒤에 시판 가능하다고 한다. (임상시험을 시작하기까지 2003년 사스 땐 20개월, 2015년 지카바이러스 땐 6개월이 걸렸으니 상당히 단축됐다.) 모쪼록 하루빨리 승전고를 울릴 수 있길!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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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0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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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와 유시민 작가가 추천하는 이야기를 보고 언제고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현대지성에서 새로 나온 완역본이 운 좋게 기회가 닿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은 오래된 책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하는 기술'의 골자가 변함없었다. 꼭지마다 다섯 장을 넘지 않는 설명은 군더더기가 없어 이해하기 쉽다. 이백권이 넘는 그의 저서 중 이 책을 꼽는덴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가 살던 고대 그리스 시대는 직접민주주의로 민회에 의회와 위원회원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참여가 가능했다.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법정에서 논쟁과 토론과 변론을 거쳐 판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설은 매주 중요했다. 지금의 변호사와 비슷하지만 변호, 고발은 《변증학》에서 따로 다루고 있고, 《수사학》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 설득(검증, 제시, 반박, 증명)으로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 에토스(연설자)로 나눠 설명한다.

수사학은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이고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수사학적 말하기 기술의 핵심은 설득이다. 설득은 일종의 증명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사실들을 많이 확보할수록 증명이 수월해지고, 그 사실들이 더 피부에 와닿을수록 연설은 진부함이 줄고 더 특별해진다(p.184).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에는 설득력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는 방법과 요소를 설득력 있게 말하는 요령도 담겨있다. 상대방의 논리를 가져와 내 주장으로 바꾸거나, 익숙한 속담을 가져와 주장을 대중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술도 있다.

"우리는 운으로 얻은 것보다 자신이 스스로 해낸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조언을 가져와 표현 방식을 "그 사람은 운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해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라고 바꾸면 상대를 칭송할 수 있다. 오레스테스를 두고 "어머니를 살해한 자"라고 나쁜 쪽을 부각시킬 수도 있고, "아버지를 죽인 자를 복수한 자"라고 좋은 쪽을 부각할 수도 있다.

"모든 논증 가운데 청중에게 박수갈채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연설가가 논증을 시작해서 결론을 말하기 전에 청중이 그 결론을 미리 예상해볼 수 있는 논증이거나, 연설가의 논증이 끝났을 때 그 즉시 결론을 알 수 있는 논증이다."

연설가는 현명함, 미덕, 선의를 쌓아 자신을 신뢰하게 해야 한다. 궤변론자는 의도만 있다면 얼마든지 될 수 있지만, 변증가는 좋은 의도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때론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의 연설이 더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과 삶에서 피부에 와닿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진실한 마음이다. 수사학은 이 보석을 다듬어주는 세공사의 손에 들린 도구와 같다. 화려한 언변으로 거짓을 감출 요량으로 읽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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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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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은 우리 삶에 아주 크고 중요한 문제다. 물론 집을 잃어본 경험이 없는 세대(우리)가 집이 없어졌을 때 겪을 상황들을 짐작하고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텍스트의 세계에서 책은 집이다."

 

우린 인쇄된 텍스트가 책이란 집에 사는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다. 저술, 편집, 인쇄, 제본이란 과정을 거쳐 마무리된 작품(책)이 먼 훗 날 언젠간 가정집 책장 안이 아니라 박물관 속 유리관에서 살게 될 모습을 상상하는게 억측일까. 비관론자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디지털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책에 바침》은 먼 길 떠나는 책에 바치는 저자의 헌사다. 장서가가 아니어도 책에 관한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날 위로해준 교양서적이든, 인생의 기로에서 함께해준 전공서적이든, 오랜만에 웃게해준 만화책이든.

 

 

 

 

 


"《로로로 영화 백과사전》은 내 집필실 책상에서 손에 닿는 자리에 있었다. 나는 개별 항목들을 추가로 참고문헌을 메모했으며 배우와 감독의 사망 일시도 상당히 꼼꼼하게 적어두었다. 그에 더해 내가 어떤 영화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도 기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짧은 평도 곁들였다. 그렇게 서서히 《로로로 영화 백과사전》은 영화와 함께하는 나의 삶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가 되었다."

 

 


우리집 책방엔 보이는 책장과 보이지 않는 책장이 있다. 보이는 책장엔 (내 기준) 소장 가치 있는 책을 꽂아두고, 보이지 않는 책장 속엔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버리긴 아까운 책과 언젠간 버릴 책들을 숨겨 두었다. 책장을 둘러보니 밑줄을 긋고, 글을 첨부하고, 손때가 탄 책은 성경을 비롯해 열권이 채 안 된다. 이 몇 권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을 책들로, 난 평생 소장할 책에만 펜을 댄다. (나머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언제고 편히 읽도록 하기 위해, 내 기록 때문에 책을 왜곡하는 일을 막고자 표시하지 않는다.)

 

 


"다 읽힌 책은 ... 책장으로 이동해서 다른 책들과 더불어 종이로 만든 담쟁이덩굴처럼 서서히 벽을 무성하게 뒤덮는다. 그 광경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나는 읽힌 책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믿는다. 여기서 책이 두 번 읽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물질로서의) 책 자체도 가치있게 여긴다. 훼손된 책이라도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폐지로 재활용되지 않고 텍스트가 살아남아있다면 가치가 여전하다 말한다. 개인적으로 한번만 읽고 덮은 책들을 보면 묘한 죄책감 같은게 느껴졌는데 저자 또한 마찬가지였단 사실이 적잖게 위로가 되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은 오죽할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했다.)

 

마음의 부담없이 책을 사도 되겠다.(음하하하.) 누군가 "또 책?!"이라고 말한다면 나의 책 수집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비축활동"이고 내가 읽은 책은 내 삶의 일부이고 이 중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내 삶의 일부"라고 말해줘야겠다.


"텍스트가 책을 필요로 하듯,

정신은 정신을 담을 그릇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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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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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mass의 어원인 고대 라틴어 massa는 짓이겨진 반죽 혹은 덩어리를 말한다. 로마의 시문학에서 massa는 혼돈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단어의 유래만보아도 대중이 어떤 집합체인지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대중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대규모 이주 활동, 원정 행렬, 봉기, 대군의 형성, 굶주림으로 인한 반란, 탄압에 대한 저항을 통해 생겨났다."

과거의 대중에 대한 인식은 '미개인들' 수준에 그쳤다. 대중은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세력이긴 하지만 역사의 주역은 아니며, 스스로를 이끌어갈 수 없는 존재로 취급됐다.

 

 

프랑스 학생운동과 혁명, 월가 시위, 아랍의 봄의 항쟁, 독일의 (서독의 핵무장 반대 가두시위) 부활절 행진 역사 속에서 인류는 오랫동안 대중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그 중 프랑스는 대중이 가장 인상 깊게 출현한 곳이다.

'1968년 파리의 5월 항쟁'도 그 중 하나이다. 항쟁의 시작은 대학생들의 (대학을 향한) 항의였다. 그런데 경찰이 시위대를 과잉진압해 학생 몇 명이 체포되었다.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가 점점 커져갔고, 학업 여건 개선 요구로 확대되었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과 폭력에 대항하던 시위대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단체로 뭉쳐 가두 시위를 벌였고, 대학가를 넘어 노동자들까지 가세하며 몸집을 불렸다. 그 결과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대중이 끌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원하는 바를 손에 넣진 못했다.)

르봉 같은 전통적인 대중 이론가는 대중을 독선적이고 극단주의적인 주체로 간주했다. 새로운 대중은 예전의 이론과 기준에는 맞지 않다.

 

 

 


"새로운 대중은 때로는 플래시몹처럼 일시적으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급진주의자들이 정치 시위를 벌일 때처럼 강제로 거리를 점령하기도 한다. ... 대중은 권위적인 지도자와의 관계를 통해 평등이 생겨난다. ...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체계화된."

대중은 일체화된 행동을 통해 자신이 속한 대중에 대한 의식과 생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생각은 의도와 목표로 발전한다. 행동과 생각이 결합되는 순간 대중은 정치적 잠재력을 갖게 된다. 이 때부터 대중은 행동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촉구한다.

 

 

 

 

 
"개개인은 대중 속에서 행동, 목표, 힘든 노력의 공통성을 통해 어떤 의미를 얻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진다. ... 우리는 개개인을 행동과 토론과 평가의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편입하는 사회 환경을 통해 존재 의미를 얻는다."

과거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정의와 공정함을 추구한다. 대중은 우리의 본능을 들끓게 만들고, 공동체 전체를 사로잡고, 그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느낌이 들게 해주고, 그들의 생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대중'이 열망하는 '평등 사회'는 언제고 이뤄질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평행 사회'가 평등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부디 저자가 평행 사회에 관한 다음 책을 내는 것보단 빨리 이뤄지길 바라본다.

 

 


 오직 동등함을 입증하는 자만이

 남과 동등하며,

 자유를 획득할 능력이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샤를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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