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은 우리 삶에 아주 크고 중요한 문제다. 물론 집을 잃어본 경험이 없는 세대(우리)가 집이 없어졌을 때 겪을 상황들을 짐작하고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텍스트의 세계에서 책은 집이다."

 

우린 인쇄된 텍스트가 책이란 집에 사는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다. 저술, 편집, 인쇄, 제본이란 과정을 거쳐 마무리된 작품(책)이 먼 훗 날 언젠간 가정집 책장 안이 아니라 박물관 속 유리관에서 살게 될 모습을 상상하는게 억측일까. 비관론자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디지털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책에 바침》은 먼 길 떠나는 책에 바치는 저자의 헌사다. 장서가가 아니어도 책에 관한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날 위로해준 교양서적이든, 인생의 기로에서 함께해준 전공서적이든, 오랜만에 웃게해준 만화책이든.

 

 

 

 

 


"《로로로 영화 백과사전》은 내 집필실 책상에서 손에 닿는 자리에 있었다. 나는 개별 항목들을 추가로 참고문헌을 메모했으며 배우와 감독의 사망 일시도 상당히 꼼꼼하게 적어두었다. 그에 더해 내가 어떤 영화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도 기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짧은 평도 곁들였다. 그렇게 서서히 《로로로 영화 백과사전》은 영화와 함께하는 나의 삶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가 되었다."

 

 


우리집 책방엔 보이는 책장과 보이지 않는 책장이 있다. 보이는 책장엔 (내 기준) 소장 가치 있는 책을 꽂아두고, 보이지 않는 책장 속엔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버리긴 아까운 책과 언젠간 버릴 책들을 숨겨 두었다. 책장을 둘러보니 밑줄을 긋고, 글을 첨부하고, 손때가 탄 책은 성경을 비롯해 열권이 채 안 된다. 이 몇 권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두고두고 읽을 책들로, 난 평생 소장할 책에만 펜을 댄다. (나머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언제고 편히 읽도록 하기 위해, 내 기록 때문에 책을 왜곡하는 일을 막고자 표시하지 않는다.)

 

 


"다 읽힌 책은 ... 책장으로 이동해서 다른 책들과 더불어 종이로 만든 담쟁이덩굴처럼 서서히 벽을 무성하게 뒤덮는다. 그 광경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나는 읽힌 책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믿는다. 여기서 책이 두 번 읽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물질로서의) 책 자체도 가치있게 여긴다. 훼손된 책이라도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폐지로 재활용되지 않고 텍스트가 살아남아있다면 가치가 여전하다 말한다. 개인적으로 한번만 읽고 덮은 책들을 보면 묘한 죄책감 같은게 느껴졌는데 저자 또한 마찬가지였단 사실이 적잖게 위로가 되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은 오죽할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했다.)

 

마음의 부담없이 책을 사도 되겠다.(음하하하.) 누군가 "또 책?!"이라고 말한다면 나의 책 수집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비축활동"이고 내가 읽은 책은 내 삶의 일부이고 이 중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내 삶의 일부"라고 말해줘야겠다.


"텍스트가 책을 필요로 하듯,

정신은 정신을 담을 그릇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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