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스노볼 밖의 세계는 영화 <설국열차>처럼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혹한기이다. 17세 소녀인 주인공 전초밤은 초여름밤의 산책을 부러워하며 스노볼 안의 세상을 동경한다. 하지만 스노볼은 겉으로 보기 좋게 꾸며진 세계에 불과하다. 스노볼 안은 추위로부터 보호되어 따뜻한 반면, 자신의 삶이 녹화·편집되어 드라마로 만들어져 스노볼 밖으로 송출된다. 추위 걱정 없이 따뜻한 날씨를 맘껏 누리는 스노볼 안과 달리, 스노볼 밖은 끊임없이 발전기를 돌려야 따뜻한 물로 씻고 생활할 수 있는 평균 온도 영하 41도의 혹한기이다. '날씨'의 차별이 계층을 만들고, 온도가 억압의 장치로 사용된다.



스노볼 밖에 살면서 스노볼 안에서 만든 드라마를 보며 자란 주인공 전초밤은 자신이 배우 고유리의 외모를 똑같이 닮았음에도 그녀의 삶을 동경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고유리 배우의 담당 감독인 차설이 찾아와 고유리가 죽었다며 전초밤을 스노볼로 데려간다. 전초밤은 죽은 고유리를 대신해 새로운 가족과 살며 고유리의 삶을 연기하는 대가로 스노볼 밖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스노볼에 살게 된 전초밤은 화려함 속에 가려진 스노볼의 어두운 면을 우연히 보게 되고, 이곳에서 계속 가짜 고유리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스노볼의 설계자인 이본 그룹은 스노볼이 무한한 지열이 생성되는 지역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사실은 "지하 발전소"에 사형 선고된 사형수들을 가둬 놓고 쳇바퀴를 돌리게 하여 생성된 동력으로 스노볼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노볼 체계에 불응한 사람들을 인간 과녁으로 사용해 쏴 죽이는 스포츠인 "바이애슬론 경기"를 모두가 즐기게 하여 스노볼 체계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켜 왔다. 




"스노볼에는 '따뜻한 진통제'와 '부유한 마취제'가 널려 있으니까요." 
-<스노볼> 가제본 p.263


주인공 전초밤은 스노볼에서 "퇴직자 마을"로 쫓겨나고 다시 스노볼로 돌아가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전초밤은 배우 고유리가 감독 차설이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삶에 불과하며, 자신이 고유리를 대체할 여러 복제인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세계"인 그곳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의 비리를 밝히기로 결심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라인홀드 니버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내게 허락해 주소서"라고 신께 기도했다. 그런데 전초밤은 바꿀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순응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고, 실패하든 실패하지 않든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에 뛰어들어 이를 바꿔보려 시도한다. 그녀는 용맹함을 가진 잔다르크와 같은 인물이다. 작가는 '전초밤'의 이름을 지을 때부터 '초여름밤의 전초'와 같은 그녀의 혁명적 숙명을 예견해 놓은 것이 아닐까.



작가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개척해 나가는 전초밤과 친구들을 통해 우리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전초밤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러 고유리 대체품과 함께 힘을 합쳐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 여러 고유리 대체품 중 하나인 '소명'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당신들은 신이 아니에요,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대단하지 않다고요. 당신들은 남에게 고통을 줘서도 안 되고, 당신들이 누군가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도 제발 버려요. 그건 당신들이 남의 영혼을 제멋대로 휘저을 핑계밖에 되지 않으니까." -<스노볼> 가제본 p.426 


전초밤은 스노볼 안에서 '가짜 나'로 살아가며 따뜻한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진짜 나'의 삶을 살기를 선택하고 더 이상 고유리를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쟁취해낸다. 

 

"이로써 우리의 탄생 목적이 사라졌다. 나를 기다리는 위대한 인생 계획과 화려한 수식어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내일의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상을 흉내낼 필요도, 나의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일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의 또 다음 날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스노볼> 가제본 p.429)"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작은 개인들의 연대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나 같은 작은 개인이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기서 불씨는 꺼져버리지만, 작은 불씨가 모이고 모여 큰 불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전초밤과 친구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 책의 목차에서부터 '나'+'너' 에서 '우리'가 되듯이, 작가는 작은 개인들이 모여 연대하면 불가능해보이는 일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스노볼'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힘 있는 자들의 입맛에 따라 법이 바뀌기도 하고, 이에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것은 서민들이다. 하지만 <스노볼>을 통해 작은 개인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대한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스노볼>이 웹툰, 웹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자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쳇바퀴를 돌리는 두 다리에 힘이 솟는다. 나와 타인의 삶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이 쳇바퀴 무덤을 떠나, 오직 나만이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스노볼을 향해 나는 부지런히 달린다. 쳇바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부쩍 스노볼에 가까워진다. - P28

엄마는 그때 이야기를 해 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그날 버스에 우리 셋이 타고 있지 않았어도 너희 아빠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가만히 앉아서 다같이 죽을 바에는 자기 하나를 희생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다 살릴 사람이니까.

아빠 얘기를 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엄마가 눈에 어른거리는 것도 잠시, 눈발이 더 세진다. 이제 내 이마에서 쏘아지는 한 줌 빛이 비추는 건 끊임없이 나를 덮쳐오는, 무섭도록 새하얀 눈 괴물뿐이다. - P39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 있던 하늘이 점차 보라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지평선이 불타는 것처럼 빨갛게 변한다. 그에 맞춰, 이제 곧 스노볼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하늘이 분홍빛으로 바뀌면서 저 멀리 거대한 스노볼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든 게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주변 땅과 똑같은 지구라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푸르다. 그 처음과 끝을 절대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투명 천장이 반짝거린다. 마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우주에 홀로 떠 있는 생명의 행성처럼 보인다. - P87

"해리야."
차설 디렉터의 목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그녀에게서 한 번 두 번 해리라고 불릴 때마다 정말로 전초밤이 세상에서 지워져 가는 느낌이다.
"나는 너를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만들 거야."
차설 디렉터의 목소리가 결연하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비행기가 스노볼의 출입국 관리소 앞 활주로에 착륙한다. - P90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언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냐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 P378

이로써 우리의 탄생 목적이 사라졌다. 나를 기다리는 위대한 인생 계획과 화려한 수식어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내일의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상을 흉내낼 필요도, 나의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일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의 또 다음 날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 P429

당신들은 신이 아니에요,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대단하지 않다고요. 당신들은 남에게 고통을 줘서도 안 되고, 당신들이 누군가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도 제발 버려요. 그건 당신들이 남의 영혼을 제멋대로 휘저을 핑계밖에 되지 않으니까. -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