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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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고픈 가을에 선물 같이 찾아온 임경선 작가의 신작, <가만히 부르는 이름>을 출간 전에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작가님의 낭독으로 출간 전 선연재 방송을 들으며 출간되기만을 기다려온 소설이라 가제본 신청에 당첨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이후 2년 만에 나온 작가님의 소설이어서 가제본을 받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하루 만에 읽었다. 이 책은 나에게 ‘고단한 하루 끝에 찾아온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같은 소설’이다. 사랑은 초콜릿처럼 달콤하지만 쌉싸름하기도 하다. 작가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를 통해 사랑의 두 가지 색깔을 보여준다.



30대 중반의 건축설계사 수진은 변화보다는 평온함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을 할 때만큼은 어떤 어려운 경우에도 “한계를 기회로 만들어보자.(p.22)”고 말하며 건축 부지의 단점도 장점으로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건축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녀의 연인 혁범은 은색 안경테에 반듯하고 깔끔한 외모에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남자이다. 조직의 혁신을 추구하다가 내부 고발자로 찍혀 직장을 그만두면서 새 건축 설계 사무소를 차리고 수진을 불러 같이 일하게 된다. 수진에게 혁범은 존경하는 선배이자 우상 같은 존재이다. 그는 일에 집중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언제나 부드럽고 단호한 사람이다. 그런 혁범을 옆에서 오래전부터 지켜봐 온 수진은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한 차례 결혼과 이혼으로 혁범의 마음은 지쳐있었다. 그는 수진을 통해 위로받지만 정작 자신은 사막과 같이 황량한 사람이다. 그가 계속 전처와 만나며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수진은 서운함을 느낀다. 수진은 혁범과 사귀면서도 늘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외로워한다. 혁범과 같이 있으면 수진은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밤에 달리는 습관을 갖게 된다.








그런 수진의 앞에 한솔이 나타난다. 수진보다 8살 어린 정원사 한솔은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남자다. 큰 키에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인디언 보조개가 인상적인 그는, 수진과 마주칠 때마다 해맑게 웃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흙과 식물을 매만지는 그가 등장할 때마다 주변 공기는 푸른 빛이 감돈다. 그런 한솔은 수진에게 정직하고 무해한 존재 (p.19)이다.

한솔은 요즘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한솔을 보며 배우 박보검 또는 서지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경선 작가도 요조와의 북토크에서 소설이 드라마화 된다면 이한솔 역에는 박보검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행여 수진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항상 배려하고 신경을 쓴다. 한솔은 수진에게 화분을 선물하고, 그녀의 풀린 신발끈을 묶어주며 즉흥적으로 그녀에게 고백한다. 그는 수진에게 매일 편지를 쓰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수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한솔의 편지는 메마른 수진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혁범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수진은 한솔과 더욱 가까워지고, 수진의 마음은 한솔 쪽으로 기운다. 수진은 엄마가 어렸을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유를 계속 생각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도 답을 얻지 못하고 상처로 남는다. 상처 많은 수진에게 한솔이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나도 맑고 투명해서 그녀는 행복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이름 모를 죄책감을 갖는다.



수진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한솔과 자신을 방치해두는 혁범 사이에서 갈등한다. 수진도 한솔을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해 온 혁범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에서 돌아온 혁범이 수진과의 저녁 식사 중에 수진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하며 실수로 유리잔을 떨어뜨리는 장면에서 극이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웅크려 앉아 안경 없이 깨진 유리잔을 맨손으로 만지며 울음을 터트리는 혁범의 모습에서 수진은 이름 모를 연민을 느끼고 혁범 옆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게 된다. 한솔은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수진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수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내어준 한솔이 불쌍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보다는 현실을, 변화보다는 익숙한 것이 주는 평온함을 택한 수진의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다.











이 소설이 짙은 여운을 주는 이유는, 각박한 회색빛 세상에서 나보다 타인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한솔과 같은 초록 빛깔 사랑이 존재하며, 우리 안에서 존재하는 사랑의 마음을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나보다 너를 연민하는 마음,

나보다 네가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네가 나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한다 해도 기꺼이 먼저 나를 내어주는 마음,

나의 가혹함을 덜어내고 너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마음."

<가만히 부르는 이름>, p.216, 작가의 말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서로 미움의 마음을 키우는 대신, 정원사 한솔이 보여준 적의 없는 초록 빛깔 사랑으로 내 안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끌어 내본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 소설의 제목처럼,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드럽고 사려 깊게 불러보라고.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면서 살아가자고.










나보다 너를 연민하는 마음,
나보다 네가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네가 나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한다 해도 기꺼이 먼저 나를 내어주는 마음,
나의 가혹함을 덜어내고 너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마음.- P216

"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 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 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 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 얻은 것이란 걸."-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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