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력이 없어서 침대 위에 눕거나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반수상태에 빠져 있는 이들, 나는 그 잠든 행성의 침묵을 지켜보면서 최악의 방식으로 끝을 향해 가는 그들의 생을 바라본다.(p.43)

"그래서 제 생각인데요, 제가 하루에 한 시간씩 피키에 씨에게책을 읽어드리는 거예요. 엄청 좋은 생각 아닌가요!? 그러면피키에 씨에게 도움이 되고, 저는 또 주방에서 한 시간 덜 있게 될테니 저한테도 좋고요! 딱 한 시간만요! 피키에 씨, 피키에 씨가 한 번 원장님에게 말씀 드려 보시겠어요?"
내 어조는 의혹과 간청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건 분명하다. 그리고 콜레라를 피하려고 페스트를 택하는 것 같은 느낌. 계속 피하려고 달아나려 했던 곳에 제 발로 찾아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노인은 이런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p.27-28)

내가 아무리 반항해봤자,결정권은 언제나 그의 주먹에 있다. 나는 가혹행위들과 부당행위들에 굴복하고 만다. 엉덩이 때리기. 불알 움켜잡기. 손가락으로귀 튕기기. 나는 뭐든 당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를 건조기 안으로 밀어넣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온도를뜨겁게 맞춘다. 아주 뜨겁게. 면직물용 강력 코스.

아, 생업의 세계여, 얼마나 행복한지! 이 문제를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을까? 엄마? 그럴 순 없다. 피키에 씨? 이런 일로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 책 읽기는 신성한 것이다. 나는 이를악물고 꾹 참는다. 그러면 매번 효과를 보는데, 소리 내어 책을읽는 동안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매듭들이 조금씩 풀린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폭군이 나에게그 모든 모욕들이 하나하나 지워진다. 낭독이 끝날 때쯤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화가 모두 사라진다.

몰입하면서 나는 모든 걸 잊는다. 낭독을 마치는 순간, 나는 망각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온다, 씻기고 정화된 채로 행복한 현실로. 나는 피키에 씨와 얼싸안을 것이다. 지금도 서로 악수를 나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은밀하게 통하는 공모자들이다.(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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