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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철모르고 호기심 많았던 학창시절에 나는 처음으로 인사동의 갤러리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학교가 근처인 이유로 가슴이 답답할 때면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는데 마침 그날 들어간 곳이 어느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던 곳이었다. 갤러리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그림이 묘하게 눈길을 끌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인상이 후덕해 보이는 한 여자분이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전시된 작품을 돈도 안내고 훔쳐보았다는 미안함에 급히 돌아서는데 시간이 있으면 천천히 구경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소심하게 그 분을 따라 들어갔다. 갤러리의 초짜 손님으로 단번에 알아보아서였는지 옆에서 아주 세심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때처럼 그림이 황홀하게 보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는 대단한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전혀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날은 전시된 모든 그림들이 마치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익숙하게 인사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림에도 각각의 사연과 작가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그 후로 인사동은 나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올해는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에 갔었던 연행(燕行) 2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김정희에 대한 배경지식이라고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라는 사실, 그리고 유명한 서한도를 그렸다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해 좀 알아보고 이 책을 읽을까 하다가 그러면 또 책읽기를 차일피일 미루게 될듯하여 그냥 읽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결정이 정말 탁월했다고 느낀 건 내가 이 책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위주로 했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책을 접하기 전에는 그림에 조예가 깊은 미술학도가 세한도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물론 저자가 미술학도가 아니라 20여년이 넘게 김정희를 연구해온 고문헌연구가였기에 책은 김정희라는 한 인물과 그림만을 단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그 당대의 역사와 학문, 예술과 그의 인생을 통틀어 광범위한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세한도라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이 그림이 그가 제주도 유배시절 이상적에게 보내는 고마운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그림은 그가 쌓아올린 학문적 깊이와 업적이 한꺼번에 발산되어 나타난 총체적 상징물인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과거공부라는 하나의 학문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글씨와 그림 등 다양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또한 10년 이상 철저히 준비해 자신이 흠모하던 옹방강을 만난 일은 그가 얼마나 집념이 강하고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사신을 통해서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은 일 또한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청대의 학문과 예술은 물론 최신의 정보를 접하며 학문적 깊이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모함과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되고 이곳에서 그 유명한 [세한도]가 탄생하게 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간 그곳에서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히 지내던 그에게 이상적이 보내주는 청나라의 그 귀한 책들은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갈증에 단비와 같았으리라. 몸이 자유로웠다면 스스로 더 분주히 탐독하고 배웠을 그에게 유배지에서의 생활과 한결같은 이상적의 신의는 책 속 학자들이 들려주었던 세상이치의 참뜻을 뼛속까지 깨닫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근간에는 그가 오랜 기간 탐구했을 글이나 서화는 물론 북학이라는 학문적 배경이 자리잡아있었고 이것이 세한도라는 그림을 통해 한 순간에 표출되어 그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한도야 말로 추사 김정희를 올곧게 재인식할 수 있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된다는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처럼, 이 그림을 통해 감추어져 있는 중요한 한 시대의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하나 둘 씩 쏟아져 나오고 그것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 발견해 낼 수 있을 때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은 물론 그가 남긴 이 세한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니, 더 나아가 외국의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한 지식인의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으로 배워야 할 역사적 소산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저자가 말하려는 것처럼 하나의 사물에 대해 드러난 한 가지 시각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깊게 바라보려 하는 의지와 역사에 대한 물음이 그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