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참 바쁘게 쉼 없이 살아왔다. 알맹이는 없어도 겉이 화려하면 좋았고,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게 낫다 싶었다. 함께 달려가다 어느 새 주저앉은 경쟁자를 돌아보기 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여기며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왔다.
허나 참 이상하다. 그렇게 피똥 싸게 달려왔는데도 제자리다. 아니,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머리는 텅 비었고 뱃살만 뒤룩뒤룩 찐 채 뒤뚱거리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닌데 그럼에도 뭔가를 자꾸 꾸역꾸역 넣기 바쁘다.
아...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해서 못 견디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교양은 없이 정보만 받아들이고 깨달음 없이 지식만 채워놓은 꼴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정신적인 가치관이 없음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고 감성이 메마른 탓이리라. 아... 정말 총체적 난국이구나.
더 이상은 줏대 없는 인간으로,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회색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른 책이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이었다. 그동안 읽어온 책들 속에서 인생 참, 어렵다, 그래도 힘차게 살아보자는 가벼운 위로를 얻었다면, 이번엔 이렇게 살아보라 하는 진짜 알맹이가 있는 책을 읽고 싶었다. 유교정신을 숭상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구구절절 옳은 문장과 이론들 앞에서는 고개가 절로 숙여질 때가 많았다. 수 십 페이지의 기나긴 연설보다 그 옛날 중국 사상가들이 툭툭 던진 한 두 구절의 문장이 진중한 깨달음을 줄 때가 많았다. 한때는 너무 옳은 말만해서 고리타분하고 사람을 질리게 한다 멀리했던 공자와 맹자 같은 사상가들의 가르침이 이제는 살아가는 혜안을 준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글자보다는 행간 사이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만큼의 나이를 먹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내 여지껏 중용이라 하면, 중간에 서서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딱히 그런 의도로만 해석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저자의 새로운 통찰이 가미되어 확장된 의미로 본다면 중용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맛과 멋이 느껴지는 인간적 매력을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또한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비전의 발현이기도 하다.
“공자는 <중용> 제4장에서 ”과(過)“ ”불급(不及)“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지혜롭다 자부하는 자들이 좀 지나치는 경향이 있고, 어리석은 자들이 못 미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지 과(過), 불급(不及)의 중간항목으로서의 중용(中庸)을 규정하거나 언급한 적이 없다...<중략> 여기 “과한 것이 불급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라는 나의 번역은 “과한 것이나 불급한 것이나 다 비슷하다”라는 표현을 맥락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과한 것이 불급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은 곧 공자가 “중용”의 덕성을 예찬한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공자의 근원적 관심은 “인(仁)”에 있었으며, “인(仁)”이란 주어진 삶의 사태를 감지하고 결단하는 심미적 감수성이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상황적이며 역동적인 것이다. 어떠한 중용이라는 실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중용은 과,불급의 상대적 사태에 의하여 양적으로 결정되는 그런 덕이 아니다...<중략> “ - 본문 중 -
이렇게 그는 중용이라 여겨진 보편적인 정의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해석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보다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한다. 단어가 주는 언어적 뜻만 이해하기보다는 삶 여러 부분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된 보다 통합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는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니 이 책을 다 읽은 후 자신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라는 숙제를 독자들에게 내주었다. 책을 읽고 그 숙제를 완성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책을 몇 번이고 더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많이...많이 부족하다. 삶의 혁명을 가져오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