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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대학 재학 시 교양과목으로 <서양음악 감상>이라는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과목을 선택한 건 내가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관련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당시 누군가가 그 수업이 제일 널럴하다는 악마의 속삭임을 전해주었고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이나 들으면서 잠(?)이나 자겠다는 고약한 심보 때문에 선택한 과목이었다. 개강 후 첫 날 강의실을 확인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통 신청인이 별로 없는 소강의였다면 작은 강의실이 배정되었을텐데 이 수업에 배정된 곳은 그 당시 가장 큰 학생회관 강의실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얍삽함으로 이 강의를 선택했을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게다가 그렇게 큰 강의실에서 자거나 딴짓을 해도 들킬 일 거의 없으니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학업이 아닌 다른 일로 공사다망했던지라 그런 자유시간(?)이 더없이 소중했으니 탁월한 선택이었다면서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첫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호빵맨처럼 둥근 얼굴에 부처님과 맞짱을 뜰만한 인자함으로 무장하신 교수님이 계셨고 그 분은 첫 시간에 음악이 아닌 영상을 보여주셨다. 칠판 앞으로 길게 뻗은 스크린에는 어떤 공연실황을 중계하는 장면이 상영되었는데 한 여자가 나와 아리따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그때 그녀가 부른 음악이 헨델이 작곡한 <리날도> 2막에 나오는 <울게하소서>라는 곡이라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 바로 그 아리아였다.
나는 거의 반쯤 누운 자세로 실눈을 뜨고 있다고 첫 장면부터 눈과 귀가 스크린에 빨려 들어가는 묘한 경험을 했다. 이 아리아가 어떤 음악적 해석과 가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듣는 순간 아름다움과 안타까움, 혹은 짜릿한 전율로 온 신경을 자극해주어 수업시간 내내 황홀한 공연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단지 스크린 상으로 감상하는 나도 이렇게 감동을 받았는데 실제 그 공연장에서 감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격정적이고 황홀한 무대를 선물 받았을지는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렇게 공연실황이 지나고 교수님은 그 음악을 작곡한 헨델과 리날도에 대한 소개는 물론 가사에 대한 해석까지 해주시면서 재미있고 살아있는 음악감상 수업을 진행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서양음악이 지루한 게 아니고 이렇게 사람의 오감을 황홀하게 자극하는 짜릿함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 강력한 첫 만남 후 나는 다른 어떤 강의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이 수업에 참여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전에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다시 되돌아옴을 느꼈더랬다. 이 책 역시 클래식은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과감히 뛰어넘도록 해준 유익한 책이었는데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유명 음악인들의 숨겨진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클래식과 음악천재들을 맛깔나게 소개해주어 아직도 책장에서 한번씩 꺼내 읽고는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읽은 서경석 교수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어떤 책일까? 앞서 말한 <파워클래식>이 클래식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면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음악자체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살아오는 동안 접하게 된 음악을 배경삼아 저자 자신의 깊은 성찰과 고뇌, 삶에 대한 물음들이 한 목소리로 전달되는 그런 내용으로 읽혀졌다. 그러니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서양음악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서경석이라는 저자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여러 편의 전작이 있을 만큼 저술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편안하면서도 속 깊은 문체로 독자를 이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책을 읽은 것인지, 읽다 만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냥 글자 그대로 그의 심경이나 느낌이 담긴 문장들을 쭈욱 읽어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오페라의 작품, 연주가, 성악가등은 나 같은 클래식 초보자에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문가의 경지를 뽐낸다. 그래서 책 속에서 그와 그의 부인 ‘f'가 하는 대화속의 음악이야기(연주자의 실력이 예전보다 나아졌다느니 못해졌다느니와 같은 연주평부터 비장함이 느껴지는 운율이라든지 힘이 들어갔지만 완만한 패시지를 주어 효과적이었다는 등..)를 글자로만 느낄 뿐이었다.
말 그대로 서양음악을 ‘글자로만 느꼈습니다’ 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이야기에는 전문 음악평론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삶의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고, 때늦은 깨달음과 안타까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자신과 주변의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그와 함께한 서양음악순례는 언젠가 한번쯤은 다시 되돌아보고픈 음악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