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지대 지만지 고전선집 429
호세 도노소 지음, 이상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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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지대의 작가는 칠레의 호세 도노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이 소설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면서 국내초역이다. 그래서 이렇게 희귀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데 먼저 고마운 마음이 들 뿐이다. 흔치 않은 남미소설, 게다가 국내에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닐 때는 책의 내용을 떠나 득템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책을 읽기 전에 책에 잠깐 소개된 작가이력을 살펴보았더니 이 호세 도노소는 칠레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음에도 어릴 적부터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한 탓에 제대로 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 부두 노동자로 지내거나 목자 생활을 하는등의 생활로 떠돌아 다니다가 나중에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를 마쳤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청소년기에 영국인 학교에서 잠깐 공부할 당시 함께 공부한 사람이 바로 멕시코의 유명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라고 하니 세상 좁다고 해야 하나?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친분을 유지했다고 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De izq. a der. Mario Vargas Llosa, Carlos Fuentes, García Márquez y José Donoso, años 70.

 <FOTO: carlos-fuentes.net>

 

사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중남미 소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아우라(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를 풍기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읽은 후에는 몽롱한 구름 위를 잠시 산책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소설과는 비교될 수 있을 만큼 현실세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으며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자아를 찾아가는 혹은 다분히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조그마한 마을을 둘러싸고 확연히 구분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한 시골 마을이다. 올리브역이라 불리는 이곳의 마을사람들은 광활한 포도밭의 주인이자 이 마을에 기차역을 만든 창조자라 할 만한 사나이 돈 알레호의 보호아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마디로 모든 부와 권력을 가지고 이 마을을 통솔하는 지배자의 형태를 띤다. 반면, 이 마을에 조그마한 매음굴을 운영하는 마누엘라와 하포네시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더 파괴되고 피폐해지는 이곳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절한 하층민의 전형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 가게를 멋지게 꾸미고 많은 손님들을 불러오리라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이미 짐작했음에도 그들은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날 수가 없다. 그곳이 바로 그들의 현실이었고, 삶이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특이한 인물은 마누엘라라는 인물이다. 자신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처럼 꾸미고 화장하고 춤을 추는, 그래서 여성이기를 바라는 댄서이다. 하지만 항상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불완전한 자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매음굴에 남기위해 하포네시타의 엄마인 하포네사 그란데와 거짓 성행위를 해야 했을 정도로 이곳에 대한 집착이 크다. 실로 소설 속 이 부분에서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이 될 정도였다. 자신을 아빠라 부르는 하포네시타에게서 끔찍함을 느끼지만 그런 그녀 곁을 떠나지도 않는다.

이 외에 돈 알레호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고 성장했음에도 그를 배신하고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 그의 부와 권력에 정면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판초는 가장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인물로 비친다. 거칠고 폭력적인데다 마초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부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며 새로운 삶과 미래를 지속적으로 꿈꾸고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1978년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마도 저 붉은의상의 여인네(?)가 마누엘라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이 소설은 웃고 즐길 수 있는 순간은 하나도 없다. 진짜 이것이 현실인지,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로 어둡고 음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호세 도노소는 이들의 삶이 비참하다느니 불쌍하다느니 하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대변하기 보다는 그저 창문 밖의 풍경을 묘사하듯 담담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더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지 모른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들이 겪는 지옥 같은 현실에는 한계가 없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되풀이 되는 것일 뿐. 절망마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Fausto: Primero te interrogaré acerca del infierno. Dime, ¿dónde queda el lugar que

los hombres llaman infierno?

Mefistófeles: Debajo del cielo.

Fausto: Sí, pero ¿en qué lugar?

Mefistófeles: En las entrañas de estos elementos donde somos torturados y permanecemos siempre, el infierno no tiene límites ni queda circunscrito a un solo lugar, porque el infierno es aquí donde estamos y aquí donde es el infierno tenemos que permanecer.

 

파우스트: 먼저 네게 지옥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말해봐. 사람들이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데?

메피스토펠레스: 하늘 아래.

파우스트: 그래, 좋아. 하지만 하늘 아래 어디?

메피스토펠레스: 이런 곳이 바로 지옥이야.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곳. 지옥은 그 고통의 끝도 없고 경계도 없어서 어느 한 곳이라고 구분해서 말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우리가 머물러야만 하는 여기가 지옥이니까... [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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