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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산사기행
승한 지음, 하지권 사진 / 불광출판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나에게는 어릴 적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는 단짝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런 우리들을 보면 다른 친구들은 하나같이 의아해하면서 묻고는 한다. 어떻게 너희 둘이 친구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담고서.
그녀와 나. 나이와 성별만 같을 뿐,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취향이며 식성, 기호, 하다못해 외적인 모양까지 하나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반면 그녀는 전교생이 알 정도의 외향성을 지닌 쾌활한 친구였고, 내가 무언가를 끄적거리면서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면 그녀는 말로 단순명료하게 결론 내 버리는 쪽이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에 끌려 둘 도 아닌 친구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졸업 후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재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트러블이 생겨났고 한번 비뚤어진 마음은 좀처럼 복구되지 못했다. 물론 그 당시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어떤 자괴감과 열등감이 그런 관계의 원인이 되었겠지만 항상 뭔가를 공유하고 같은 공간에 있던 우리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다 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리두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서먹해져버려 각자의 바쁜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즈음,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누군가 한자 한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손 편지를 받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더욱 놀랬던 건 봉투에서 그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봉투를 뜯어 두툼한 편지지를 꺼내는 데 알싸한 산 냄새가 코끝을 향기롭게 스쳐갔다. 그녀는 지금 전라도의 어느 산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하고 있다고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템플 스테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는데 며칠 간 사찰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체험하며 정신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했고 그녀는 대학에 가서 처음 맞는 여름방학을 그곳으로 정했다했다. 남들은 유럽이니 일본이니하며 해외여행에 심취했음이 분명한데 홀로 사찰에서 수양중이라니... 나는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역시 그녀답다라는 생각과 함께.
그 날 이후 우리는 예전의 관계를 초고속으로 회복했고 그녀는 지금도 가끔 산사기행을 떠나곤 하는데 난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마음의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 [나를 치유하는 산사기행]을 읽다보니 그 옛날 그녀와의 일이 문득 떠올랐고 요즘 같이 심란함을 느끼는 내가 한번쯤은 시도해보아야 할 여행길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다.
이 책을 쓰신 승한스님은 전국의 24개 산사를 돌아보는 동안 독자들에게 자연과 삶의 진리를 맛보는 신비로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보물처럼 고즈넉이 자리 잡아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사들을 찾아 함께 여행하면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물론 상처받은 채 꼭꼭 닫혀있던 우리 마음의 문까지 활짝 열 수 있는 그곳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이끌어주었다. 크고 작은 산사들에서 하룻밤 묵고 그곳에 얽힌 설화나 옛 이야기를 들으며 고요한 산사의 풍경을 그대로 담은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은 여기에 있을지언정 마음만은 벌써 그곳에서 최고의 휴식을 맛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 길 한 걸음 한 걸음에 스님의 깨달음이 더해져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삶의 물음들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답하고자 마음먹었고 조심스럽게 그 물음에 답을 해나가는 동안 번뇌로 가득했던 마음에 드디어 작은 햇살이 비추는 묘한 경험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산사기행을 통한 치유의 길이었구나 싶다.
여태까지 나는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환(幻)으로만 살아왔다. 또 탐·진·치, 색·성·향·미·촉·법,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감옥에 나를 스스로 가두고 살았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 갇혀 산 것이다.
나는 오늘 삼천사 마애불 앞에 엎드려 나에게 묻는다. 못나면 못난 대로, 뭉툭하면 뭉툭한 대로,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대로 앉고 서서 나도 마애불 같은 눈과 코와 입술로 살아갈 순 없는가? 내 삶의 상감무늬를 새길 순 없는가?
화두(話頭) 하나 들고 산짐승처럼 걸어 나오는 나에게 삼천사 마애불이 속삭였다.
“너 없이 살아봐!”
“너 없이 살면 돼. ‘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진아(眞我)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어.”
[본문 중]
살면서 점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힘들어지고 아무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본래의 나와 대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이는 마음의 혼란스러움이 정신에까지 이어져 육체마저도 허우적대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우리의 아름다운 산사를 찾아 고요하게 정적을 깨는 풍경소리도 듣고 눈을 감은 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볼 수 있다면 스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상처들을 느끼면서 잊고 있던 진짜 자유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