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이맘때 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충격 속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그녀의 책을 읽고 이렇게 평했었다.

“ 한 인간을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괴시키고 영혼마저 통째로 오염시킬 수 있는 비극의 삶. 그런 최악의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글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라고.

  진짜 그랬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열 일곱 소년의 삶은 청춘의 꽃을 피우는 젊음이 아니었다. 삶이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공포스런 하루하루 속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작품.
그런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작품을 다시 들춰보게 한 책을 오늘 완독하였다. 프리모 레비라는 저자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을.

그렇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나치, 유태인에 관한 무시무시한 역사의 현장이 그려진 책인데 먼저 프리모 레비라는 저자가 나의 시선을 끈다. 살아있는 건 기적이고 예외일 수 있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한 몇 안되는 행운의 사나이. 그런 그가 집으로 돌아간 후 수용소에서의 처참한 기록들을 자신의 깊은 성찰로 풀어낸 책들을 저술한다. 물론 그 책들은 독자는 물론 당대의 평론가들에서 찬사를 받지만 결국 그는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책을 통해 역사를 회고하는 동안 그가 다시 감내해야했을 과거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쉽지 않다.

우리가 유태인, 나치, 수용소 이렇게 세 단어만 떠올려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있다. 히틀러의 미치광이짓에 참혹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수많은 유태인들과 민간인들의 아픔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아니 좀 균형이 잡혔다고 해야하나? 언제까지고 유태인만이 고결한 희생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살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개개인을 묘사하고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저자 자신이 유태인이면서 같은 유태인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과 풍자였다. 항상 희생자라고만 곱게 포장된 그들을 한 겹 벗겨보면 또 다른 위선적인 ‘인간’이 목격되었고 지금 그들이 ‘선택받은 우월한 민족=유태인’이라는 공식이 나치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자자는 책에서 이렇게 유태인들을 비판한다.

“ 그래서 나 역시 유태인에 대해선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네. 자기네들끼리 알력과 내분으로 무자비한 만행도 서슴지 않고 말이야.”

“ 3년쯤 전이었네. 키예프 강경파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나치와 모종의 거래조건으로 서민층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가 하면, 자기네들의 신성한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한다고 유태인 이민자 252명을 태운 배를 하이파항에서 폭파시켜버렸다네. 또 작년초에는 루마니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던 슈트루마호도 가라앉혔네. 그 배에 타고 있던 760명의 유태인들은 오늘도 같은 날 제사를 치루지.”

“이렇게 자민족 약자들을 무시하고 학살하는 시오니스트들에게 타민족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가 없겠지. 그들에겐 오직, 어쩌면 나치보다도 더 잔인한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깊이 뿌리박고 있을지도 모르네. 나치의 유토피아가 전 유럽의 패권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게르만민족의 광대한 식민지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다면, 유태인들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해 하나의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하는 게 아닌가. 난 서로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보네.”

물론 이 책은 나치로부터 도망 다니는 빨치산 부대원들의 저항활동 치열한 생존기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다보면 이렇게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유태인의 면모도 고발하고 더 나아가 살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에게 총구를 겨눌 수 있는 인간의 추악함을 고뇌하듯 이야기한다. 저자는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한 없는 연민을 느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자라면 누구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같은 걸 느끼게 되요.”라고.
결국 이러한 자기 성찰이 저자를 자살로까지 몰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안간힘을 쓰고 버텨 삶을 유지했음에도 그 생존을 부끄러워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추악한 역사는 제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홀로코스트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너무 빈약하다"고 고백했던 프리모 레비의 말이 마지막까지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어느 유태인이 나치에게 총살되기 직전 허락받은 30분 동안 지은 가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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