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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평점 :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분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학창시절에도 담탱이라고 스승들을 비하하면서 친분을 쌓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도 찾아갈 스승 한 분 없는 건조한 인생탓이기도 하겠지.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너무도 경계가 분명해서 쉽사리 그 선을 넘었다가는 오지랖이 넓고 주제 넘는다는 비난이 화살이 날아올 터 점점 더 인간관계는 좁아져 간다는 걸 느낀다. 그럴 때 이외수 선생 같은 책 속의 스승을 만나면 적잖은 위로가 되어 피폐하게만 여겨지는 삶에 약간은 넉넉해진 여유마저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역시 책 속 스승님의 촌철살인 같은 몇 줄의 말은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며 뇌리에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어느 순간에는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닐꺼다’라며 나직하게 타이르는 것도 같고, 또 어떤 때는 ‘그래 인생 뭐 있냐?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귀뚜라미 소리라도 들을 수 있고 밤하늘의 별이라도 올려다보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거다’라며 소박한 삶의 정겨움을 다시금 일깨워 주시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의 제목은 ‘아불류 시불류’ (我不流 時不流) 라 하여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인생진리를 화두로 독자들에게 깨우침을 전달하고 있었다. 내 시간의 주인공은 나라는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말 임에도 이 제목의 풀이를 읽는 순간 뭔가 머리를 탁 내려치는 경험을 했다. 아주 어린 시절 읽고 내내 잊고 있었던 동화책의 한 페이지가 생각나듯이 선명하게 시간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뭐가 그리 바쁘고 힘들다고 시간개념조차 흐리멍텅해진 채로 이 시간까지 도시를 배회하는지 흐릿해진 내 자신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고 멋지게 만 보이던 도시의 풍경이 쓸쓸한 잿빛으로 변해버린다.
어렵게 궁둥이를 비집고 앉은 지하철에서 가만히 이 책을 펼쳐본다. 책에서 맡을 수 있는 건 글 향기뿐 아니라 잔잔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도 맡을 수 있었는데 내 삶에도 이런 향내가 나면 얼마나 좋을까 슬쩍 희망해 본다.
나 어릴 땐 이런 어른이 되고자 했던 게 아니었는데...
나 어릴 땐 내 미래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책도 덮고 눈도 감아버렸다.
내 시간, 내 자유, 내 영혼...온통 다 내것 뿐인데 왜 이 세상에 내것은 없다는 생각만 그리도 주구장창 해왔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뭔가를 빼앗고 소유하고자 애를 썼는지 참 덧없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온 인생선배들의 말씀은 틀린 말이 하나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인생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삶의 의미도 켜켜히 쌓여가겠지 싶다.
이 노련한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 이리도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지...
내 인생, 내 시간이 이제야 온전히 내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전해오는 쓸쓸한 밤이다.
책 속의 스승은 오늘도 나에게 살며시 위로를 날리며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