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도 머리를 깎아 변발을 했고, 장상과 대신, 여러 신하들도 머리 깎고 변발했으며, 일반 백성마저도 머리 깎고 변발했다. 비록 공덕이 은나라, 주나라에 비길 만하고, 부강하기가 진한 적보다 낫다고 해도, 사람이 생긴 이래로 머리 깎고 변발한 천자는 있지 않았다. 비록 육롱기나 이광지의 학문과 위희나 왕완, 왕사정의 문장, 그리고 고염무와 주이존의 박식함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한 번 머리 깎아 변발하고 보면 오랑캐일 뿐이다. 오랑캐는 개나 양이니, 내가 개나 양에게서 무엇을 본단 말인가?
(중략)

  성곽은 장성의 나머지요, 궁실은 아방궁의 찌꺼기일 뿐이다. 일반 백성들은 위진(魏晉)의 부화함이 있고, 풍속은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이나 당나라 천보(天寶) 연간의 사치스러움이 있다. 중국이 망하매 산천은 변하여 비리고 누린내 나는 고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성인의 실마리는 인멸되어 묻혀서 언어조차 변화하여 야만의 습속을 따르게 되었으니, 볼 만한 것이 무에 있겠는가? 진실로 십만의 무리를 얻어 내달려 산해관으로 들어가 중원을 깨끗이 쓸어버린 뒤에야 장관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馹迅隨筆)', 박지원,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167~168쪽에서 재인용

  '청나라의 볼 만한 것'에 대하여, 앞 문단은 조선의 높은 선비[上士]가, 뒷 문단은 중간 가는 선비[中士]가 말하고 있다. 높은 선비는 청나라를 금수의 무리들로 여겨 거기에 볼 만한 뜻있는 것이 없다 일갈하고, 중간 가는 선비는 그들의 풍속이 음탕하고 졸렬하고 사치한 것만 모방하여 참됨이 없다고 외친다. 선비의 높고 중간감의 차이는 그들을 금수로 보는가 인간으로 보는가의 여부이겠다. 그렇다 해도 선비들이 보기에 청나라는 결국은 신성한 중원을 어지럽히는 하찮고 기고만장한 무리들이라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낮은 선비[下士]가 기와 조각과 똥 부스러기를 뒤적거리며 그 곳에서 쓸만한 것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은 곧은 대의를 입에 담는다.
  높은 선비와 중간 가는 선비가 어찌 옛 조선에만 있으리오. 우리 주변에서도 그들의 곧고 아름다운 행적은 계속 들려오고 있다. 상대방의 낮음을 금수로 여겨 욕하며 그들의 비난을 들으면 금수에게 물어뜯긴 양 분노하는 높은 선비들과, 상대방의 졸렬함을 통렬히 비웃고 그들의 비루함과 허술함을 비난하여 이죽거리는 중간 가는 선비들의 곧디 곧은 행적을 그대는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이 자신의 뜻을 높이 세울수록 주변의 하찮은 오랑캐 무리들은 그 행적을 병자의 것이니, 혹은 정신으로만 승리를 구하니 운운하며 비난한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나 같은 하찮은 선비의 말류에 있는 자가 그들의 준엄하고 통렬한 행적을 보며 본받아 따르려 하니, 내장이 꼬이고 입술이 파드득거리어 입에서 끽끽거리는 된 엄소리만 나올 뿐이다. 아! 하찮도다, 나의 뜻이여! 나는 그저 높고 중간 가는 선비들이 비난하는 오랑캐의 기왓장과 똥무더기를 뒤지며 그 속에서 화씨의 옥이나 찾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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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라운드 종결 이후 10년간, 노르웨이와 스위스의 농가소득 중 3분의 2 이상이 보조금에서 나왔으며, 일본 농가소득의 절반 이상이, 그리고 EU는 3분의 1 이상이 보조금에서 나왔다. 설탕과 쌀 같은 일부 작물의 경우 보조금은 농가소득의 80% 선까지 이른다. 미국, EU, 일본의 농업보조금 총액이(관개용수 등에 대한 보조금처럼 보이지 않는 보조금을 포함해), 실제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총수입을 초과하지는 않지만, 이 지역 소득의 최소 75%에 이르며, 이는 결국 아프리카 농가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유럽의 소는 하루 평균 2달러의 보조금을 받는다(세계은행의 빈곤측정 기준). 이에 반해 개발도상국 국민의 절반 이상은 2달러 미만의 소득에 의존해 살고 있다. 개발도상국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유럽의 소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176~177쪽, 조지프 스티글리츠, 21세기북스

  인간은 과연 존엄한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익과 가치가 개입되면, 이 존엄함의 절대성은 흔들린다. '존엄함을 지닌 대상'이라는 시각 대신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보게 되면서, 노예제도라는 것이 생기고, 개발도상국의 국민보다 부유한 소가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한 발짝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인간 외의 다른 생물들은 존엄한가? 만약 존엄하다고 한다면, 인간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생물은 다른 생물에 비해서 덜 존엄할 수 있는 것인가?
  유가와 묵가의 논쟁 중, '겸애'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다. 묵가는 모든 대상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말한다. 차별을 두는 것은 자연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는 이에 반대한다. 어떤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까운 것을 더욱 사랑하고 먼 것을 조금 덜 사랑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과연 어느 입장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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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5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경제학의 본질은 바로 선택에 있다. 즉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정책은 일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대신 또다른 일부 그룹(외국자본가 등)에게는 이익을 주며, 일부 그룹(노동자 등)에게 위험부담을 지우는 정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원하는 정부의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는 정부와 시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가?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해야만 하는가? 정부는 인센티브를 부여해서 특정 산업을 부양해야만 하는가? 노동자, 소비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규제를 도입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균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 마련이며 국가마다 차이가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20쪽, 조지프 스티글리츠, 21세기북스

  1등의 공부 비법을 따라하기만 한다면 1등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1등과 나의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대조한 뒤, 그에 맞춰서 1등의 공부 비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는 공부만의 비법이 아니다. 경제학과 국가 정치에서도 적용될 수 있으며, 문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고전 문학의 창작론 중 '법고창신론(法古創新論)'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다. 군사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은 병법도 그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전개해야 이길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과연 여기서는 옛 법을 따라야 하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가? 이건 나의 생각이 옳은가, 다른 이의 의견이 타당한가? 이런 다양한 선택지가 제시된다는 것은, 일단 그 자체로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선택지 없는 막힘없는 길은, 오히려 의심을 해 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야 할 방향성이 확고하기에 선택지 앞에서도 확고하다면 그것은 옳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선택지가 나오지 않는 계속된 전진은, 뭔가 큰 오류가 있기 때문에, 혹은 선택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닥쳐올 여러 문제에 많은 갈등을 하고 그 갈등에 괴로워하기를 바란다. 가는 길에 고난 없기를 바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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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불공평한 분배를 유발한다면 그 성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불공평한 분배로 인한 사회적 응집력의 상실이나 사가의 저하가 궁극적으로는 성장 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은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공평성과 효율성이 상충하는 관계에 있다는 도식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재분배정책이 최소한 단기에서는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여지가 다분히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평한 분배를 지향하는 정책이 어떤 형태로 수행되느냐에 따라 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심지어는 긍정적인 효과까지 기대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공평한 분배를 위한 정부 개입이 효율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도식적인 사고에 젖어 재분배정책에 대해 불필요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경직된 태도를 갖는 것보다는, 효율성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최소화한 합리적인 재분배정책을 찾아보겠다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편이 훨씬 더 바람직하리라고 생각한다.


<재정학> 269~270쪽, 이준구, 다산출판사

  세상을 받아들이는 법은 무척 쉽거나 무척 어려운 것 같다. 쉬운 길은, 자신의 생각을 단순하게 맞추는 것이다. 특정한 이념, 종교, 사상, 혹은 구호 같은 거라도 좋다. 그 '목소리'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어려운 길은, 자신의 생각을 단순하게 다듬는 것이다. 갈등과 모순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몸으로 움직이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괴로워하면서, 계속해서 깨트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뭔가 불변하는 것이 남을 것이다. 혹 그런 것이 남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족할 것이다. 그렇게 얻은 단순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분배에 대해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 긍정하는 목소리, 부정하는 목소리, 감정적인 목소리, 팩트를 중시하는 목소리, 비판하는 목소리, 비난하는 목소리, 옹호하는 목소리, 찬양하는 목소리, 침묵하는 목소리. 이 목소리들 중에서 과연 나는 어떤 목소리에 맞출 것인가? 나는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 길의 끝은 멀리 있는 것 같다. 이준구 교수의 말 속에서, 그 먼 길을 걸어가는 방법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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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해가 떠오르는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출 시간이 지났지만 두터운 구름과 자욱한 아침안개 때문에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태양이 솟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 섰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마을의 정겨운 산과 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평화로웠다.


<운명이다> 335쪽,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돌베개

  생각이 많다. 글 따위로는 모두 옮길 수가 없을 만큼 과하게 넘쳐흐른다. 그래서 생각을 글로 옮기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 너머에서, 저문 해는 다시 떠오른다는 진리는 여전히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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